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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젊은시절 [1]: 학창시절 (1959-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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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하였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그 당시에 Canon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예술을 배우는
데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폭넓은 학창시절에서 나는 비교적 많은 친구들과 선배
들과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지금 내가 나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학의 학창
시절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기 위함이다. 중고등학교시절에야
별로 인상에 남을 만한 일이 없지마는 대학교의 학창시절은 평생을 두고 생생한 기억
으로 남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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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유학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나의 건강상태는 정상이 아니어서 어머님께서 무척도
걱정을 하셨다. 그 당시에 나는 지금은 이혼한 김수정 (피아니스트, H 음대 교수로 재직
하다가 은퇴: 가명)와 결혼하여서 독일로 떠났다. 집안에서는 그래도 누군가 보살펴 줄
사람이 있으니 안심하고 유학을 떠나 보낸다고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독일의 학제를 잘
알고 계셨고 학비가 없고 학생에게는 특별한 건강보험이 주선되어 있음도 알고 계셨다.
독일로 떠나던 날 아침에 아버님께서 나와 독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너는
지금 신병으로 고생하는데 치료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 국내에서는 우선 치료
가 불가능하고 또 가능하드라도 보험제도가 없어서 개인의 비용으로 의료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국내에서의 치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독일에 유학생으로 가서 독일의
발전된 보험제도와 의료혜택을 받으면서 거기에서 장기간 동안 치료를 받도록 하여라.
몸이 건강해지면 성공해서 귀국하고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게 되면 독일에서 너의 생을
마치는 수 밖에 없겠다". 이는 나에게 비장한 결심을 하라는 뜻이었다. 어머님은 도저히
그런 생각으로 아픈 자식을 독일에 보낼 수는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매우
냉정하시고 또 합리적인 사유를 하시는 철학자이시라 나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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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나의 생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택하면 된다. 니체가 말하는 스스로 멸망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높은 수준의 인격체인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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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등은 디플롬(Diplom)이란 증서만 받는다. 내 독일친구 두 명은 예선에서 떨어져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나는 본선에 올라갔는데 5 등을 하였다. 본선에서의 꼴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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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하였다. 지멘스전산실에서 나는 열심히 성실히 일하여 1974 년에 같은 시스템을
가동할 무렵 1974 년도에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공항시대가 열렸다. 오일값이
치솟아 대그룹에서 정보처리를 수작업하는 수준에서는 민첩하게 유동성 있게 기업경영을
할 수가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AEG Telefunken 과 SIEMENS 에서는 컴퓨터에 의한
순발력 있는 정보처리 및 의사결정 시스템을 가동하여서 환경변화에 대하여 민첩하게
대처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Evers/Kim 의 그 시스템은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던 AEG Telefunken 은 그 당시의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난을 겪게 되었는데
TELEFUNKEN 회사는 프랑스에 그리고 AEG 는 스웨덴의 ABB 전기회사에 각각 인수합병
되었다. 그러나 SIEMENS 는 아직도 건재하여서 세계적인 독일기업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서 나의 컴퓨터 시스템 개발과 프로그래밍의 흔적은 지금도
독일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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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베를린 음악대학에서는 작곡, 지휘법을 수강하였고 피아노렛슨도 받았다.
집에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연습할 수가 있었다. 또
베다니병원의 간호사 기숙사로부터 나와서 베딩(Wedding)지역의 Kiautschoustrasse 4
번지에 매우 넓은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를 갔다. 천정이 4 미터나 되는 높은 방이 네
개가 있고 한방은 넓고 커서 거기에다 그랜드 피아노를 놓았다. 한 밤중에 연습을 해도
방해된다는 사람이 없는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5 년간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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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예가 있었다. 한번은 오르드루프(Ohrdruff)에서 우라늄폭탄의 핵실험(1943)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뤼켄(Ruecken)에서 플루토늄폭탄의 핵실험(1944)이 있었는데 모두
다 성공적이었다. 그러면 핵폭탄의 운반기술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궤도비행 폭격기)도
다 개발되어 있었는데 왜 핵폭탄을 미국에 던지지를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지금도 풀려
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핵실험을 지켜본 히틀러가 절대로 그러한 대량살상무기는 사용
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핵폭탄 대신에
“잠재우는 폭탄 (Schlafbombe)”를 개발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은 20 일 동안은
금식한 상태에서 건강이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적군을 20 일동안 잠을 재우고서
일정한 장소에 가두고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에 깨어나면 항복문서에 조인하도록 하면
전쟁은 수월하게 승리로 끝나게 할 수가 있다는 확신을 히틀러는 참모들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과거의 히틀러와 가까웠던 참모들로부터 인간의 목숨이나 많은 문화전통
시설물들을 파괴시키지 않고 승전할 수 있는 방법은 “잠재우는 폭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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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당시 결혼생활에서 김수정 위주의 생활에 많은 혐오와 부담과 허탈감 마저
생겨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971 년 우리 두 사람의 유학생활에서는 5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김수정은 서 베를린 음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또
그뿐인가? 약 6 회에 걸친 피아노독주회 그리고 3 회에 걸친 오케스트라 협연 그리고
콩쿨대회(Busoni 와 Viotti 콩쿠르)에 참가하였다.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그 다음으로는
마스터코스에도 여러번 참석하였다. 타트야나 니콜라이에바(Tatjana Nikolajewa)와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의 마스터코스는 매우 중요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기회
이기도 하였다. 그의 뒤를 내가 100%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나는 김수정의 자기표준의
인생대로만 살아가야 하였다. 나는 나의 인생설계를 새롭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전제
조건이 결혼생활을 과감히 청산하는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아직 어린 애기들이 생기지
않았을 때에 이혼하는 것이 가장 절호의 기회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마침 김수정이
런던으로 이주하여 알프레드 브렌델에게 장기간 사사하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하고 생활비를 대어준다고 약속하였다. 6 개월간 런던으로 생활비를 보내주고 또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도 보내주기로 하였다. 6 개월 이후에는 김수정이 자력으로
런던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할 기회를 얻어 생계를 유지하겠다고 말 하였다. 그러면서
나도 영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는 일단은 김수정의 영국생활부터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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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국가시험을 포기하고 학적을 자유대학의 철학과로 옮겼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인
철학공부에 몰입하였다. 1970 년까지의 행복했던 나의 평범한 가정생활은 1971 년도
에서는 혼자 독거하는 처지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영위하는 인생을
설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보다는 내가 자유인으로서 나의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고자 하는 염원이 더 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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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하지 아니한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고 또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인생설계에 도전하는 것으로서 나의 인생행로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1971 년 말에
나는 서 베를린 북부의 모아빗 (Moabit)이라는데의 원룸으로 이사를 갔다. Wedding 의
Kiautschoustrasse 보다는 집세가 1/4 로 줄어 들어서 그 차액을 런던으로 송금해 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모아빗의 원룸은 나치독일 당시에는 감옥이었고 뒷마당에서는
사형집행도 행해진 곳이라 사람들이 임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값도 싸고 빈
원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1974 년까지 살았다. 6 개월간만 런던으로
송금해 주기로 했는데 김수정에게는 1974 년까지 매달 200 파운드씩 송금해 주었다.
런던에서는 물가가 비싸서 겨우 집세나 내는 정도밖에는 되지 아니하였다. 나머지
생활비는 본인이 피아노렛슨으로 벌어야 했는데 Alfred Brendel 렛슨비는 내가 별도로
송금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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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이상, 하이젠베르그, 바이츠제커 등 많은 훌륭한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과
만났지만 한번도 그들과 사진을 찍자고 한 일은 없었다. 피터 막(Peter Maag)에게 4 년간
지휘사사를 받으면서도 사진 한 장 찍어놓은 것이 없다. 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이 재단을 설립할 때에 내가 기금을 내놓았기 때문에 직접 카라얀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가까이에서 만나 대화하고 악수한 일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광경을 사진을
찍고자 하지 않았다. 혹 어떤이가 사진을 찍었다고 해도 내가 필요하니 한 장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나는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과 사진을 찍고 그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덜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유명한 사람들이 나같은
무명한 사람과 찍은 사진을 내 보이면서 자랑할 것으로 생각되는가? 그들은 나와 사진
찍은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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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월 2500 마르크 정도의 대우였다. 역시 프로그래머
로서 공무원들의 복지사업 및 제 2 차대전의 피해자들을 보상하는 사업들을 전산화
하는데에 나의 폭넓은 시스템분석과 프로그래밍이 총동원 되었다. 나는 서 베를린 정부
기관에서 막중한 프로젝트의 리더의 자리에 있었기에 구조조정의 여파인 외국인 근로자
해고에서는 제외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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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과의 행정관들 우리 전산실 직원 등 합하여 약 200 명이 청중으로 모였다. 홀의
좌석은 500 석이었다. 그리고 음악회가 끝난 다음에 간단한 다과가 있었고 모두들 나와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지어 내게로 오는 것이었다. 음악이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을 나는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도 피아노
전공자가 아닌 전산실의 프로그래머가 연주하는 것이라 하여 더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존경하는 하이젠베르그 교수의 피아노실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1974 년 성탄절 직전에 있은 일이었다. 그때의 나의 흐믓했던 기억은
지금 내 젊은시절을 회상하면 더 생생하게 나의 뇌리에서 그림으로 떠오른다. 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었고 더 똑똑했고 또 더 성숙되어 있었다.
지금은 나는 많이 전락되었다. 나의 삶이 지금처럼 무의미하고 덜되고 또 보람이 없이
영위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이상 나의 인생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을 정도이다.
사람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먹으면 그만큼 성숙하고 더 교양이 높아지고 더 점쟎아야
할텐데 내 경우는 그렇치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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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가동되자 Siemens 에서는 경사가 났다. 오일쇼크 때에 지멘스에서는 최단
기간에 자유자제의 유동성 기획을 통해 의사결정을 즉각 내릴 수가 있었다. 외국인들을
해고시키는 구조조정에서 나는 특례로 제외시키도록 할테니 AEG 를 사임하고 Siemens
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에 이미 서
베를린 노동사회청 전산실로 직장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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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로는 내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는 가장 큰 긍정이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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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했기 때문에 다시 의식이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야리우스여사가 전보용지
종이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깨어난 나에게 주면서 급히 한국에 전화를 해 보라는
것이다. 전보의 내용은 영문이었다. "Please wire me. Kyung Bae Min. Yonsei University"
그리고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가 쓰러진 것은 아마도 과로한 탓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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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1974 년에서 1977 년까지 3 년간 나는 런던에다 송금을
하지 못하였다. 김수정은 런던에서 자리를 잡아서 경제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면서
내가 서 베를린 시에서 공무원 대우를 받고 일을 하게 된 것을 무척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을 하였다. 나더러 독일국적을 얻으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럽에서 평생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체로 한국여성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유럽에서 여자들을 위해주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더 편안하고 대접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김수정도 그러한 여자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유럽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는 연세대학교로 귀국하겠다고 말하자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12 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그래 고작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귀국하려고 하는가? 인생의 목표가 그 수준밖에 안 되는가? 자기는 지금 세계정상에
도전하는 피아니스트인데 한국에서 교수로 불러준다고 해도 안 가겠다고 하면서 내가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봉직되어 가는 것을 유학생의 실패한 경우라고 실랄히 비판하고
나섰다. 나는 그래도 귀국해야겠다고 주장하면서 그 순간 이혼에 관한 내용을 언급
하였다. 나와 함께 연세대학교로 귀국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혼합시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피아노과 교수직을 내가 알아보아 줄 수가 있다고 제안
했을 때에 나를 비웃었다. 고작해야 연세대학교의 교수자리 하나 맡겠다고 고생스런
유학생활을 했는가? 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계속 가겠다고 하면서 이혼하는
것이 서로간에 불가피하다고 거의 동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이혼문제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진행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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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받아 가기도 한다. 나는 그때부터 연세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하면서 또 신학과
철학 분야에서 강의하고 논문도 왕성하게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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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핏셔(Martin Fisher)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 하였다. 히틀러
는 분명히 멸망하게 되어 있다. 세 가지 중에 한가지만 알고 있어도 망하지 않을 수
있는데 히틀러는 그 세가지를 다 모르기 때문이다. 1) 하나님, 2) 인간, 3) 역사.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알고 있어도 안 망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교회의
십자가를 다 철거하고 자기의 초상화를 걸으라고 명령하였다.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수없이 죽였다. 인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역사를 보면 알텐데 히틀러는 역사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망하게 되어 있었다. 이 말을 되풀이
하면서 박정희는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멸하게 되어 있다. 그 역시 신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고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넘어지는 사람에게 발길질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다 마치고 우리는
10 월 26 일 주문진을 떠났다. 서울에 거의 다 왔을 때에 저녁 늦게 긴급뉴스속보에
박정희가 서거했다는 보도에 접했다. 그 대학원생들이 다음날 모두 다 내 방에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목사님은 큰 예언자이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미리 아시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는 학생들에게 다시 말했다. 공산주의는 망하게 되어 있다. 누가
무너뜨리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논리의 붕괴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의 서거가 누구 때문인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최측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즉 그는 자기모순으로 인하여 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자신도 스스로 모순속에
거하게 되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논리적인 모순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1979 년 10 월 26 일 나의 가르침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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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고 언제 어디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이 있을지를 예측할 수 없는 매우 불안한
사회상이 나의 눈 앞에 벌어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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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학생지도위원이니 학생들의 동향과 향후 우리나라
의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인지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어 하였다.
단순한 통역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들 나를 통하여 한국의 정국에 관한 내 의견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독일에서 지난 일 등에
관하여 소상히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로 한반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발전은 후퇴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고무적인 견해를 피력
하였다. 특히 스위스 대사님은 중립국의 입장에서 자기도 그러리라고 믿고 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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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부상열차가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에 경부선의 고속전철을 독일의
트랜스래피드로 설치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자 김철호
회장과 당시 김기중부회장 두 분을 모시고 독일로 가서 북부독일 라텐 (Lathen)의
트랜스래피드 자력부상열차 시험운행지역엘 방문하였다. 적어도 서울에서 강릉/속초
까지 자력부상열차로 연결할 생각이었다. 시속 500km/h 로서 서울에서 강릉/속초까지 한
시간 이내에 질주할 수가 있었다. 나는 연세대학교의 교목생활은 완전히 청산하고 명성
그룹에서 사업전선들을 오가면서 콘도와 골프장과 위락시설을 건설하는 일에 동분 서주
하였다. 1978 년 5 월에 연세대학교로 귀국한지 3 년만인 1981 년 7 월에 모처럼의
교목직을 나는 사임하였다. 그리고는 명성그룹의 정식 이사로 부임하였다. 미국의 수퍼
컴퓨터회사인 DEC (Digital Equipments Corporation)로부터 최신 모델을 도입하여
전산실을 꾸몄다. 두산그룹, 한국화약, 선경(SK) 등에서 우리의 아담하게 설치된 전산실을
구경하러 오곤 했었다. 나는 그 전산실에서 우선 콘도예약을 전산화 하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명성그룹에서 DM (direct mail) 발송을 시도하였다. 50 만명의 콘도회원에게
홍보문서들을 매달 DM 발송했는데 코오롱그룹에서 자기네들에게도 그 시스템을 개발해
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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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든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소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곤 하였다. 하늘이 감동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먼저 감동되곤 하였다. 그리고 일에 임할 때에는 큰 긍정을 얻기
위하여 나는 내 자신을 부정하곤 하였다. 한번도 내 개인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적인 관심사를 물리치지 않으면 절대로 큰 긍정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명성그룹이 완전 하게 제 5 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시절)에 의하여 해체될 줄은
몰랐다. 명성그룹이 당시의 상업은행 (지금 우리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서 콘도와
골프장과 레저타운을 개발하고 청산하지 못한 금액이 1066 억원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환율로서는 정확히 미화 1 억불이었다. 나는 앨라스카의 원주민 상호신용금고로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앨라스카의 원주민들과 우리나라의 조상들과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이야기 하면서 우리 나라의 관광사업에 투자하게 되면 부가가치가 높은 이익이 창출될
것이라고 설득하여서 미화 1 억불의 차관을 확정짖고 돌아왔다. 그런데 귀국하는
과정에서 나는 앵커리지 (앨라스카 수도)에서 뉴욕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나의
형님집을 방문하였다. 거기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뉴욕발 KE001 을 타고 서울
김포공항으로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형님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시기에 앨라스카
원주민들의 자금을 빌려서 명성그룹의 회사부채를 해결하게 되면 김철호회장님을 다시
회사에 복귀시키고 정상화 시킬 수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뉴욕을
떠나서 서울로 향하는 대한항공 KE001 기에 탑승해야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앨라스카의
원주민 상호신용금고 부사장이 조인한 1 억불 차관승낙서를 형님의 책상에 놓아둔 채
공항에 나온 것이다. 형님은 우선 먼저 떠나게 되면 DHL 우편으로 발송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포공항에 마중나온 회사의 임원들에게 바로 그 문제의 중차대한
차관승낙서를 내어 보여야만 했었다. 빈손을 들고 그들을 만나서는 안되겠기에 다시
형님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비행기 탑승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추격되어서 탑승한 여행객 전원이 몰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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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 하였다. 그 과정에 관하여서는 더 이상 내가 서술하기를 원치 않는다. 결국 나는
연세대학교 교목직도 잃고 또 명성그룹의 중역자리도 잃은 실직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후로부터 나는 세기적인 풍운아의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셈이다.
그 해에 영락교회의 당회에서 나에게 부목사로 대우하여 줄 터이니 한경직목사님 기념
사업회의 업무를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영락교회의 몇 몇 장로님
들은 내가 연세대교목이었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잠시 한경직 목사님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생겨났다. 그 당시에 원로목사님으로서 남한산성의 한가한 지역의
독채집에 거하시면서 명상과 집필의 생활을 하고 계셨다. 나는 설교녹음한 것을 카세트
에 옮겨서 판매하는 사업을 하였고,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 기념관의 내부를 과감하게
수리하였다. 그리고 독서실도 따로 꾸며 놓았다. 그러자 한경직목사님은 미국에서
“목사님들의 노벨상” 이라고 알려진 템플턴 (Templeton) 상을 수상 받으시게 되었다.
미국으로부터 저명인사들이 대거 영락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나의 기념관의 대폭적인
수리작업은 마치도 이러한 경사를 예견한 것으로 교인들에게는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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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 대전의 개척교회의 발전을 위하여서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나에게
그날의 한경직목사님는 더 더욱 근엄하시고 경건하신 성자처럼 보였다. 그날 나에게는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전혀 물욕과 권세욕과
명예욕 등이 보여지지 아니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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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받아 드려져서 나는 취리히에 2 년간 머물 수 있는 방편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가 형님과 작별하고 나는 다시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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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날다가 병들어 떨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자연은 그대로 대규모의 병원이다.
나는 이러한 자연병원에 입원되어서 나의 건강을 거의 다 회복하였다. 편두통도 다
없어진 상쾌한 상태에서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지휘수업을 계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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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고 하여 쌍 모리츠시에서 스위스의 거장 피터 막(Peter Maag) 을 기리기 위해
역사적 유물로 보존하고 있다. 피터 막 선생님의 부인 Marica 는 폰트레지나의 냉장고에
먹을 것을 아주 융성하게 준비해 놓고는 내가 쓸 용돈을 부엌식탁에 놓아두곤 하였다.
르노 자동차는 내 전용으로 내어놓아 언제라도 베른(Bern)에 가서 피터 막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피터 막 선생님의 내게 대한 사랑과 배려였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께나 선생님께나 내가 입은 신세를 갚지 못하였다. 그런 내가 어찌 자식으로
부터 효도를 받을 수 있으며 어떤 제자가 그런 나를 존경하겠는가? 81 세까지 건강
하셔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베로나 원형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신 인격이
고매하신 분을 모셨음에도 나는 그의 영광과 축복에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한 훌륭하신 분들에게 대한 나의 보답은 내 남은 여생에서 잠시라도 좋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작은 정성이 담긴
삶의 표현이다. 그러나 내가 그분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배려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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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어 있었다. 계자소스, 도마도케챕, 마요네즈, 매운소스 등이다. 그리고는 샐러드와
올리브 또 싱싱한 과일들이 식탁에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어떻게 음식먹기를 시작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피터 막 선생님이 제일 먼저 소고기를 차돌위에 올려
놓으셨다. 즉석 불고기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싱싱한 양파와 마늘을 함께 올려 놓으셨다.
고기가 다 익자 여러가지 소스와 함께 드시면서 이것을 일본에서 배워왔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다 선생님을 따라서 그렇게 고기를 차돌 위에서 굽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별미였다. 돼지고기도 그렇게 구으니 맛이 특이하였다. 서로 대화를 해가면서 천천히
식사를 했는데 그 불에 달구어진 차돌맹이들이 전혀 식지를 않는 것이다. 와인이 아주
맛있는 것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저녁식사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호프만의 이야기 공연이 끝나고서도 우리는 또 한번 그런 저녁식사 파티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가르도여사가 내게만 할 비밀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자기는 후두암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수술을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주변에서 수술
을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회복은 되더라도 노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는데 자신은
노래를 못하는 인생은 곧 죽은 인생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고민이 크다고 하였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해결할 방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한방요법이 발달되어서
수술을 하지 않고라도 완전회복이 가능하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가르도씨의 얼굴
에서는 화색이 돌면서 한국에 얼마간 체류하면 되겠냐는 것이었다. 한 두달의 휴가로서
는 안 되는데 적어도 1 년 정도는 체류하면서 한방치료를 장기간 받아야 한다고 설명
하였다. 용감히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에다 사표를 내고 한국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간 저축해 놓은 돈도 있으니 1 년간 체류하는 것은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유명한
성악가이니 한국에서 렛슨을 하게 되면 체류비를 벌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1985 년초에 일단 한국에 귀국하여서 상항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가르도
씨는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일주일 휴가를 얻어서 나와 함께 귀국하였다. 김기중
회장님이 그 당시 독채집을 가지고 계셨기에 이층에 방하나를 내어 주셔서 가르도씨는
그 집에 휴가기간 동안 머물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대구의 경북 대학교의 음악
대학 심송학교수(테너)를 만나서 두 학기동안 초빙교수자리를 주선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경북대학교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성악가이니만큼 흔쾌히 초빙교수로 초청한다고
하였다.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특별 아파트가 준비가 되어 있어서 1985 년 가을학기부터
대구에 머물 수가 있도록 확정이 되었다. 대구에는 한약방과 한방의사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에서 가르도씨는 2 년간 머물면서 후두암을 완전히 치료하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
갔다. 지금도 고령인데도 노래를 부르는 행복한 성악가로 독일에서 잘 살고 계신다. 나는
1985 년말까지 폰트레지나에 거주 하면서 나의 지휘자수업과 우주입자물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내가 가르도여사를 도와서 한국에 초빙교수자리를 얻게 하여 준 것을 피터
막 선생님은 자기에게 베푼 일처럼 생각을 하시면서 고맙다고 여러번 인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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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매한 인격자이신 그 선생님을 나는 가까이에서 모신 적이 있었다. 나는
1986 년도에는 폰트레지나에서 내려와 다시 취리히로 갔다. 거기에 한국에서 사업가
들이 몇명 나를 찾아와서 사업을 위해 좀 도와달라는 청탁이 있었다. 그들이 내 호텔비
를 다 부담해 주기로 하고 또 나에게 예후로 돈을 좀 주기로 하였다. 취리히에는
한국음식점으로 "고려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한국에서 온 사업가들을
자주 만났다. 내가 머문 호텔은 Hotel zum Storchen 이라고 스위스에서는 고급호텔로
인정되는 곳이다. 거기에서 우연히도 나는 미국인을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워싱톤
근교의 프레데리히스부르그(Frederichsburg)에 사는 스미스 (Joseph Smith)라는 사람
이었다. 그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나치전범들을 재판했던 뉘른베르그 법정에서
법관으로 나치독일 장교들을 심문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원래 나치독일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아서 그때의 법정에서의 일을 낱낱이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스미스씨는 미국인이지만 독일어를 독일사람처럼 유창히 하고 어조나 액센트에 전혀
어색한 데가 없어서 처음보는 사람은 그를 독일인으로 생각할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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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면서 나는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도 지휘자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이 눈앞
에 보이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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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앉아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하였다. 나는 혜성이를 데리고 브란덴부르그
문으로 나갔다. 역사적인 순간을 역사적인 장소에서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그 날밤 수
천명이 브란덴부르그문을 걸어서 동 베를린과 서 베를린을 오갔다. 그런데 서 베를린
에서 동 베를린으로 가려면 검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동 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올 때에는 아무런 통제도 없었다. 그리고 그해 12 월 23 일에는 동 베를린의 샤우슈필
하우스(Schauspielhaus)에서 레오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 심포니 제 9 번을 지휘하였다.
12 월 25 일에는 서 베를린의 필하모니홀에서 같은 연주를 하였다. "환희의 찬사(Ode an
die Freude)"를 "자유의 찬사(Ode an die Freiheit)"라고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 나는
테레비 중계로 보았는데 그 감격스러움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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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타고 내려왔다. 인간은 인간을 배신하고 또 속이고 자기의 유익을 챙기기
위하여서 이용도 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을 때에는 그 인간을 폐기처분
한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너무나 많이 당했다. 나를 통해서 학자로서 음악가로서 사업가
로서 성공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의 한때에 절실했던 인간 관계를
초개와 같이 버렸다. 나와 음악과의 관계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내게서 아무도 믿을
수가 없고 종교도 헛것이고 재물도 헛것일 때가 있지마는 음악과 나와의 관계는 그렇지
가 않다. 음악예술에 대한 내 마음으로부터의 숭경은 한시도 그칠날이 없다. 오죽하면 내
몸에 음악이 임재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혈액순환과정이 곧 음악의 흐름이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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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 개가 넘는다.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음악사 자체가 기적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은 모챠르트와 슈베르트의 작곡들이 남아
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기적중의 기적이 축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평생 음악과
가까워야 한다. 그것은 정언명령 (Kategorisches Imperativ)이다. 누가 학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생각처럼 절대적인 a priori 로서 그들의 음악은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인생회고록은 계속된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intermezzo 를 넣는 것은 나의 맑은
생각을 재확인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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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히로시마여! 안녕!” 이라는 역사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처럼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컴퓨터를 내가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종이에다
볼펜으로 수작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1992 년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서
혜성엄마가 나에게 돈 한푼 내어 놓지 않았다. 그간 내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벌어놓은
돈을 다 썼다. 그래서 내가 혼자 지내면서 나는 집세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교통비도 없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고 먼 거리는 불가불 무임승차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음악활동은 마음속에서 완전히 접었다. 베를린에서 내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지휘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히로시마여! 안녕!
이라는 역사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수집과 자료분석과 나의 상상력 등을 총동원하여서
문학작품의 창작에 몰두했던 것이다. 나는 샤를로텐부르그 (Charlottenburg) 궁의 공원
벤취에 앉아서 하루종일 글을 썼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내가 쓴 원고종이들이
모두 다 젖었다. 글씨들이 번져나갔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새 종이에다 옮겨 적었다.
이러한 나를 아무도 경제적으로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노트북 구형이라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내 하는 일이 수월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에 슈베르트를 생각하였다.
그는 너무나 고생하여서 어머님 묘지에 가서 땅을 치면서 울었다. "어머님! 왜 나를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까? 왜 나를 낳으시는 수고를 하셨습니까? 어머님께도 내게도
부질없는 노력일 뿐입니다." 이렇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어머님이 자기를 낳아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 것인데 원망하고 질책한다고 하는 것은 불효중의 불효가 아니겠는가?
나는 나의 고생을 슈베르트의 고생에다 비교하였다. 나는 그 정도로 심각하거나 낙심
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여유가 많고 근심걱정이 없고 무슨 일이든 감행할 수 있는 용기
를 가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슈베르트에 비하면 천배 만배 행복한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지금 작품도 아닌 것을 가지고 노력하고 집착하는 내 자신이 슈베르트 같은
위대한 작곡가에게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역사소설을 쓰려면
핵과학사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21 세기의 핵시대의 여명"이라는 학구적인
저서를 그때에 동시에 저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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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성이의 생일날인 8 월 11 일에 서울 페스티벌 홀에서 현성이는 피아노
독주회를 했다.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에서 1 - 16 변주까지 절반만 연주하고, 베토벤
의 비창소나타, 슈베르트의 세 개의 피아노를 위한 곡 (Dreistueck fuer Klavier)를
연주하였다. 현성이는 뷔르츠부르그에서 그 곡들을 렛슨을 받았고 또 Martha Argerich
에게도 한번 가서 실력을 점검 받아보기도 하였다. 소질이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그때에 내가 현성이와 약속했다.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 피아노 독주회를
열어주겠다고.... 그 약속이 나의 아세아 출판사와의 원고계약조건으로 이행된 것이다.
나는 현성이의 피아노독주회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성이는 친구들, 가족들
앞에서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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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가고 물었다지요. 그 왕은 한참후에 말하였다고 합니다. 내 딸에 대한 슬픔은 눈물을
흘리는 단계를 넘어선 슬픔이었다고 답하였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지나치면 눈물이 나지
않지요. 슬픈 정서가 완전히 경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경질된 정서가 조금 풀리게 되면 그때에 눈물이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스 S!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우리 좋은 출판사업을 하십시다. 그리스어로 지식이라는 단어는
“노애마 (Noema)” 입니다. 우리가 출판사를 새로 등록하여서 노애마라고 하고 좋은
서적들을 많이 출간해내면 얼마나 좋은 일이며 보람된 일이겠습니까?” 나는 미스 S 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혜성이와 함께 유럽에 여행갈 계획을 세웠다. 나는 며칠후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등을 찾아가서 해외생활을 하다가 부녀간에 귀국하여서
함께 저서를 출간해냈다고 설명하면서 출간된 책자들을 내어 놓았다. 1995 년도의
히로시마 원폭과 관련된 "히로시마여 안녕!"과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 그리고 혜성이의
"미완성과 완성"에 관한 내용을 인터뷰한 다음 일제히 신문에 기사화 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네이버에 들어가 "김정양 김혜성"을 검색하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그때의 기사들이 확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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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누구나 직감하게 된다고 하셨다. 나의 문학창작에 대한 소질을 인정하신 것이다.
큰형님의 제안은 그때부터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한 심정으로 또 동생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심정으로 제안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음악활동을 계속하고 싶었다. 그때에 귀국한 이후로 나는 다시는 유럽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전화와 서신으로 독일에서의 뒷처리를 해결하고 국내에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김기중회장님이 나와 함께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셨다. 바로 그때에 8 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김철호회장님은 가석방되어서 출옥하셨다.
명성그룹을 다시 재건하겠다고 하여서 과거의 명성 식구들 여러사람들이 다시 모여
들었다. 나도 그 중에 한명이었으나 나는 다시는 사업하는 현장에는 발을 디뎌놓고
싶지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유인으로 머물고 싶었다. 사실 그 당시 나의 마음속에는
현성과 혜성이 그리고 혜성엄마 등과 나는 결별을 결심하고 있었다. 또다시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서 나의 귀한 인생의 시간을 우왕좌왕 하고 싶지가 않았다. 가정이 나의
인생행로에서 그렇게도 중요한 요소는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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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활동은 내 당대를 위한 것일 뿐 글을 남겨서 후세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의 인생의 행로에 궤도수정을 가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많은 글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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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이는 세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혜성이는 송파여중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에
혜성이 엄마는 길동사거리의 시장내에서 화장품가게를 운영하여 애들을 데리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 즈음하여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어서 방송마다 신문마다
설명되고 있었다. 국민전체가 새로운 통신망에 접선코자 범국민계몽운동을 방불케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기중회장님을 만나서 명성재건이나 남원온천개발 등에 관한 사업이
있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 어떤 돈을 좀 가진 사람이 과거에 내가 컴퓨터전산처리의
실력을 가진 것을 알고 나를 찾아 왔다. 인터넷과 연관된 사업을 하여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취지로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래서 인터넷카페를 내가 구상해 거기에
투자하기로 하였다. 당시 2 억원만 있으면 오늘날 다음이나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카페를
다자인 할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금방 나에게 투자할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 후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한 두달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나의 제안으로 자기가 혼자서
인터넷카페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오프닝 하는데 와서 보라는 것이다. 2 억원이란 자금이
들지 않았는데 잘 될것 같다면서 내게 고맙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보니 선릉역 근처에다
장소를 얻어서는 인터넷카페라는 간판을 걸고는 커피숍을 열었다. 책상마다 PC 가
한대씩 올려져 있었다. 인터넷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도 고용되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터넷하는 것을 배우는 인터넷 커피숍을 열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의 만남과 대화의 광장인 인터넷 카페를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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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슈베르트 추모행사를 지원하고 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혜성이를
바이올리니스트로 소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해 4 월 17 일 나는 슈베르트 탄생
200 주년 기념음악회를 국립극장 해오름홀에서 개최하였다. 혜성이가 나의 지휘로
모챠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 1 번을 연주하고 나는 슈베르트의 심포니 "The Great"
전악장을 지휘하였다. 물론 메짜이대사님도 그 공연에 참석하셨다. 오랫만에 나는 다시
무대에서 지휘를 하였다. 그날의 음악회의 포스타와 프로그램을 미스 S 가 정성을 들여서
높은 수준의 디자인으로 인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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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톤이었다. 현금으로 환산하게 되면 약 20 억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전체의
정신자세가 국가가 부도가 나게되면 자기의 결혼이나 운동경기를 기념하는 패물과
메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전 세계로 그 광경이 뉴스에 나갔다. 정녕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국가위기를 자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애국심이 있구나 하는
매우 긍정적인 인상이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세계도처에 새로 심었다. 김대중대통령은
계속하여 국채를 발행하고 해외투자를 유치시켜서 2001 년 8 월에 195 억달러의 잔금을
상환함으로써 IMF 로부터 빌린 구제금융총액을 모두 다 상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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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의 음성을 경청하면서 나의 인생의 행로를 걸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형님의 목소리나 아내의 목소리나 자식의 목소리를 따라서 나의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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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또 자주 만나게 되었다. 1999 년 말에 대우빌딩에 사무실을 내서
나를 정식으로 회사의 고문으로 대우하였다. 나는 그때에 혜성이를 데리고 프리마호텔에
장기체류 하였다. 구원창이라는 젊은 사업가가 이두재와 친구였었다. 프리마호텔로 나를
찾아와서 자기의 사업에 스위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줄 수 없겠는가고 물었다. 강원도
의 영랑호 부근에 레저타운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스위스의 관광자금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미 한국산업은행에 2 억불이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들어와 있었고 또 남원약수온천개발을 위하여서 4 천만불의 사용허가가 난 일이 있음을
알려주면서 김기중회장님과 의논하여서 우선 허락이 난 4 천만불을 강원도 영랑호
레저타운개발에 투자하는 일을 추진해 보라고 제안 하였다. 어느날 프리마호텔로 김기중
회장님이 구원창이와 함께 나를 방문하였다. 이렇게하여 나는 이미 접었던 사업에 대한
미련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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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 월중순경으로 기억된다. 이미자사장이 파주에 좋은 땅이 있는데 거기에다 관광
단지를 스위스자금으로 건립하면 어떻겠는가고 내게 의논하였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이미자사장의 자동차로 파주에 갔다. 비가와서 길이 미끄러웠다. 자동차를 묘지 부근에
주차하고 문제의 현장을 답사하고자 산으로 올라갔다. 길을 안내하기 위해 이미자사장이
앞장을 섰다. 산 중턱에 올랐는데 거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땅이라고 설명하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 안전히 붓잡으려다가 낭떨어지 아래로
내가 굴러 떨어졌다. 돌에 내 머리를 부딪혀서 나는 기절하였다. 아무도 없는데서 이미자
사장은 나를 무릎에 안고서 "사람 살려주세요. 도와 주세요"하고 외쳤으나 산울림만
메아리칠 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자사장은 하나님께 기도 했다고
말했다. "살려만 주세요. 깨어나게 도와 주세요. 그럼 이분을 잘 모시 겠습니다." 나를
혼자 놓아두고 자동차 있는데로 가서 차를 가지고 동내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려면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만 같아 그대로 나를 안고 의식이 회복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고 했는데 아마도 한 10 분 아니면 길어야 20 분 정도였을
것이다. 비가 내리면서 내게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의 부축으로 나는
간신히 자동차 있는데로 다시 올라왔다. 그래서 파주의 병원에 이미자 사장은 나를
입원시키고 제부인 전지표전무를 불러 그 병원에 오게 하였다. 병원에서 내머리를 CT
촬영을 하였다. 전문의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물혹이 발견 되었다고 하였다. 그 물혹이
뇌를 압박하게 되면 두통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 병원에 입원하여 그 다음날
퇴원 하였다. 호텔에서는 혜성이가 혼자서 안절부절 밤잠을 설치 면서 기다렸다고
하였다. 호텔로 돌아왔는데 내머리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넓은 반창고를 부쳤는데
보기가 흉하여서 주홍색 베래모를 사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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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다. 물론 사전에 그 이름으로 새로 법인등기를 냈다. 이제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였다. 그때에 이미자 사장과 동생네 들의 아이들이 회사로 찾아와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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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고자 노력하였다. 그 분을 한국에 초대하여서 한국의 시장조사도 시키고 또 호주와
좋은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부천과 소사에는 과거의 신흥종교집단이었던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이 있었다. 그 옆의 광활한 대지에 약 1200 개의 아파트를 짖는 일에 내가
관여하여서 유대인 유리엘 바르(Uriel Barr) 를 불러서 해외자금을 유치할 생각도 해
보았다. 이 모든 노력에는 경비가 들게 되어 있었다. 돈만 사용했을 뿐 수익사업은
하나도 성공된 것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 2003 년 5 월이 되었다. 이라크난민돕기
자선음악회를 6 월 30 일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엄에서 계획하여 국회합창단이
출연토록 이미자 사장과 의논코 있었다. 그때에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하피스트를 초대할
생각이었다. 이미자사장은 자기의 아들을 오케스트라와 협연시켰으면 좋겠다고 하여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 3 번의 1 악장을 연주하게 되었다. 수서에서 나는 두대의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에서 만반의 음악회의 준비를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공연을 위하여서 나는 약 6 천만원을 과감하게 지출하였다.
오케스트라, 대관료, 국제적인 연주료 그리고 국회합창단원들의 단복을 최고급으로
패션디자이너에게 맡겼다. 총경비가 그만큼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나는
2003 년말이 되었을 때에 수익사업은 없고 지출은 많아서 결국에는 수서의
현대벤쳐빌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직면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어느 누가 나에게 거액의 자본금을 대어 주면 그러면 멋진 사업을 해보겠다."
나는 이런 생각은 그 발상이 노숙자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자기의 노력으로 사업을 우선은 작은 규모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가만히 남이 가져다 주는 것만을 기다리고 낮잠만
자고 있는 사람에게 수백억의 자본금이 주어지는 법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004 년부터 새로운 각오로 나의 인생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러한 때에 2004 년 성탄절에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형
쓰나미사건이 일어났다. 스리랑카도 굉장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 되었다. 나는 이듬해
2005 년 4 월 5 일 식목일에 쓰나미재해 난민돕기 자선음악회를 양재동의 한전아트
센터에서 개최하였다. 그때에 나는 현성이를 모챠르트 피아노협주곡 제 27 번의 협연자로
무대에 세웠다. 이것은 14 년전에 독일에서 아버지로서 딸에게 하였던 약속이 이행되는
순간이었다. 현성이는 아버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번 약속 한 것을 계속하여 마음에
두어 언젠가 때가오면 그 약속을 실현하시는 분이라고 감탄 하였다.
8. 나의 노년시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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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사를 표명하고는 그만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으니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2005 년 6 월 12 일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98 회 일본의
원자폭탄개발”이라는 다큐먼터리영화가 MBC 에서 방영되었다. MBC 에서 거의 10 년
동안 나의 행방을 찾는일에는 나의 후배친구 이두재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이두재를 몇 번 만났을 때에 그런 제안을 들었던 일을 기억하였으나 정말
로 방송에 다큐먼터리영화가 제작되어서 방영될 줄은 그때에는 알지 못하였다. 일본이
제 2 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원자폭탄 개발에서 시소게임을 하였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일인데 나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고 또 이두재가 MBC 의
친구에게 사실을 알아보고 일본의 핵개발의 제반 경위를 방송망을 통하여서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인하여서 미국
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은 나라로만 알려졌는데 일본이 스스로 원자폭탄(겐자이
바쿠단)을 개발하여서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내용이었다. 그것이 나의 연구로 인하여서 처음으로 공개되자 많은 물의를 일으킨
가운데에 그 책에 거론된 일본핵물리학자들이 현존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MBC 에서
나를 앞장 세워서 그들을 인터뷰하고자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이두재로부터 소상히
들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연구한 내용을 가지고 저작권행사를 하든가 스스로 방송망에
등장하여서 새로운 뉴스를 전하는 언론인의 입장을 원하지 않았었다. MBC 의
다큐먼터리가 방영된 이후에 박 PD 는 인터넷 사이트에다가 나의 이름과 나의 저서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을 거론하면서 그 다큐먼터리영화의 동기부여에 관한 소상한
배경을 알린바 있다.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 독보적인 위치에서 연구한
내용에 대한 독점의식을 가지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알려지는 것이 타당한 것 뿐이다.
누가 연구하여서 세상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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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고 또 LHC 의 입자물리학개론을 재정리하는 작업에 몰입하였다.
그리하여 2009 년 3 월 14 일 서울 사이버대학으로부터 LHC 에 관한 입자물리학개론과
“신의 입자”에 관한 설명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약 90 분의 강의한 내용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신의 입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한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의 강의한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데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신의 입자”라는 개념이 그로 인하여서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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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원, 오케스트라단원 그리고 청중들 모두에게 나의 지휘한 그 음악에 특별한
감흥을 받았다고 하였다. 유튜브에 그때의 공연한 녹화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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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나는 현재까지 불편하지만 장루주머니를 부착한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관이 건강하기 때문에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노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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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7 년 12 월 31 일 새벽에 다시 그 하얀 옷을 입은 낯선 청년이 환상중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짜증을 내는 어조로 나에게 “왜 음악으로 답하지 아니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세상에 음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리고 나는 음악전공자도 아닌데
왜 내가 음악을 해야만 하느냐?”고 되물었다. 나 역시 다소 짜증나는 어조로 그에게
반문하였다. 그때에 그는 침착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글쎄, 지구촌에는 차고 넘치는
정도로 음악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요. 한마디로 지구는 음악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듣기 좋은 음악이 별로 없어요. 당신의 음악이 듣기가 좋아서 부탁한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세요. 그럼 당신의 생명은 계속 연장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
청년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참동안 상념에 잠겼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 이 무슨
내용일 것인가? 내가 정녕 음악을 올바로 해석하는 사람인가? 내가 연주하면 천상에까지
듣기 좋은 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것인가? 나는 다시금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 앞에서 지휘하는 일도 해야 하겠지만 내가 독자적으로 음악을
해석하는 길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녕 듣기 좋은 음악을 내가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 혼자서 노력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다시금 피아노음악에 대하여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피아노독주회를 통하여서 내가 천상에 감명을 올려 바치는 계기를 마련하려는 결심이
지금은 돈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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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에게는 체력이 남아있다. 그리고 나의 두뇌 역시 제대로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피아노음악에 열중하려고 한다. 지금 나의 마음바탕은 예술혼에 대한
숭경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되찾은 것이다. 오호라! 여기가 “인생의 르네쌍스의 한
복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 스쳤다. 나는 갑자기 인생의 희열을 몸 전체로
느끼게 되었다. 지금 내 몸은 떨리고 있다. 내 몸의 전율은 “환희”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 나의 나이는 77 세이다. 또다시 독일어로는 “술의 숫자 (Schnapszahl)”가 된 것이다.
금년의 내 생일날에는 술을 한턱 내는 대신에 음악의 파장을 술잔에 듬뿍 부어서 나의
주변에 뿌려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금 나는 음악에로 정진해야 한다. 이번에는
피아노 음악에 내 모든 생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깨어나자!
일어나자! 할일이 많이 있지 아니하냐? 무엇이든 집착하게 되면 시간은 충분한 것이다.
그 이름 모르는 청년의 말대로 음악에 집착하는 한 나의 생명은 연장될 것으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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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너를 키웠다. 나의 진짜 아들은 다섯살 때에 죽었고 누가 다른 아이를 내게 데려다
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그칠 수가 없었단다.” 나는 이러한 말씀을 듣고 다시
신중한 자세로 일어나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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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습관처럼 되었다. 너는 인식을 못했을 따름이야. 아마도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미 다섯살 때에 부활하였으니….. 인간이 죽지 않을 수가 있겠냐? 허나 너는 오래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형편이 생기든지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든지 너는 살
아남게 될 거야. 지금 난리통에도 살아남았지 않으냐? 이제부터는 열심히 공부하고 너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보답이고 또 부처님 오신날에 태어
난 네가 부처님께도 지켜야 할 도리인 것 같다.”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
여 어머님으로부터 소상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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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이제 아직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은연
중에 나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내가 부자가 되었다면 얼
마나 나쁜 악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돈이 많으니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었
을 겁니다. 또 내가 큰 명예를 얻었다고 하십시다.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더 나쁜 짓을
하였겠습니까? 건강을 주시지 않았기에 나는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여서 김소위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큰 진리를 깨달은 것은 바로 옆에 함께 누어서 대화하는 중에 김
소위로부터 배운 것이 그 원인이 된 것입니다. 나의 젊은 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았지만 은연중 나는 축복을 받은 생을 영위하다가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소위와 같은 올바른 목사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돈이나 명예를 구하지 말고 또
건강마저도 하나님께 맡기시고 축복의 참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소령의
수첩을 부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다음날에 수도육군병원으로부터 퇴원하였다. 다시 건강
을 회복하고 화천의 제15사단의 최전방 GP부대로 원대복귀 하였다가 원주의 하사관학교
에서 교관근무를 하고는 나의 병역의무를 무사히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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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잘 못 쓰시기 때문에 늘 아버님의 편지의 말미에 몇마디 대필하는 형식으로 아버님이
어머님의 말씀을 편지에 쓰시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님의 친필 편지가 왔다. 내용
은 매우 간단한 몇 마디의 문장이었다. “나를 용서해다오. 내 생각이 부족하여서 너를 야
단을 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네가 나의 부엌 조리대 위에다 달아오른 냄비를 올려놓아
검은 둥근 자국을 낸 것을 가지고 얼마나 야단을 쳤던지….. 그게 잘못되어서 너에게 용
서를 빈다. 아침마다 네 생각이 나면 그 둥근 검은 냄비자국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너를
위하여서 기도한단다. 그것이 너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구나! 좋은 흔적을 남겨준
것이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지금서야 깨달았다. 부족한 어머니라서 네가 그런 흔적을
남겨주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어떻게 너를 기억하고 너를 위하여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
겠느냐? 참으로 고맙고 잘 한 일인데 내가 알지 못하여서 너를 심히 꾸짖었었다. 다시
한번 부탁한다. 용서해다오.” 나는 그 어머님의 친필편지를 다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어머님은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나는 그저 “남몰래 흘리는 눈물”만
으로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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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할 수가 있었다. 경찰들은 측면 바람의 압력에 안전 하려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
고 충고해 주었다. 교량위를 달릴 때에는 반드시 속도를 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사
건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었는데 다시금 기억이 생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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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앨라스카 원주민 상호신용은행의 투자합의서
류를 형님집에 놓아둔 사건으로 인하여 그 비행기를 타지 아니하고 다음날 다른 비행기
편으로 귀국하였다. 나중에 바로 내가 탑승하려고 하였던 그 비행기가 격추되어서 전원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기필코 천재지변이나 대형사고로 인하여서 이 세
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뻔 하였던 일을 여러 번 체험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액운을
비켜간 것이 내가 77세의 고령에까지 무사히 이르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나의 생명이 무사한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나
는 지금도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20대의 청소년 그리고 김소위 시절이 참 훌륭하였다
고 생각된다.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는 인생의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다. 지식이 많
으면 무엇하겠는가?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큰 명예를 얻었다고 하면 내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남들은 나의 인생을 보고 허송세월을 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돈도 벌지
못하고, 명예도 얻지 못하고 학벌도 없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였는가? 77세가 되어서 내
어 놓을 것이 없지 않는가? 사실이 그렇다. 나는 허송세월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때가 내것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한국에 살면 그
곳이 내 공간인가? 내가 독일에 살면 거기가 나의 집인가? 이 세상은 어디에라도 나의
본 고향은 될 수가 없었다. 나는 끝없는 배회자 방랑자의 신세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러면 77세가 되기까지 그 시간이 과연 나의 시간이었는가? 아니다 나는 항상 나의 시간
은 현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지금 여기가 곧 나의 설 자리이고 나의 누려
야 할 시간이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떠난 타향살이로 한
평생 살아왔다. 그러나 불가불 내가 자랑할 것은 나는 마치도 외계인처럼 살아온 것이다.
나는 한 순간도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
에 속해 있지 않은 자신을 영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고등학생시절에 “나
의 십계명”을 따로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닌 일이 있었다. 두 가지의 계명은 지금도 내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돈과 여자는 멀리한다. 2) 이 세상에 있으면서 외계인처럼 살
아간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돈과 명예와 건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에게 돈의 유혹이 없지 않았다. 나에게 미모를 가진 여인의 유혹이 없지 않
았다. 나에게 건강에 대한 권유도 없지 않았다. 보약을 먹어라! 건강을 위하여 헬스케어
를 하라! 오래 살려면 이런 저런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모두가 다 부
질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서 사는 보람은 무엇인가? 나는 매일같이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면서 살
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3) 나는 누구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나? 4) 나는 왜 이 세상
에 속하면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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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만 영혼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을 “의인들의 회중”이라고 하였다. 영혼
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 있다. 거기에로 나는 되돌아 갈 것이다. 나는 그 “의인들의 회중”
으로부터 이 세상에 왔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속해야 할 곳이
아님을 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하
였다. 지금 여기에 기록하는 나의 인생회고록은 한 외로운 영혼의 방랑기에 지나지 않는
다. 나는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나에게 되어진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있
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것 하나도 과장할 필요도 없고 또 없는 사실을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있었던 일들을 없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나
의 지나온 과거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한 역사가의 입
장에서 기록 하였다. 나는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에 접어든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20세기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잊혀진 20세기”라는 글을 집필하였다.
그리고나서 나는 나에게 알려진 일들을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다물논고 삼부작이다. 그 밖에 남의 나라이지만 그리고 내가 살았던 시대가 아니지만 나
치독일의 역사를 따로 기록하였다. 그것이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제3제국의 흥망성
쇄사”이다. 그 밖에 나의 단편적인 산문형식의 글들이 있다. 단행본으로 인쇄하여 출판해
낸 책자로는 “21세기 핵시대의 여명”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20세기에 대두된 핵과학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의 참상을 재구성
한 역사소설 “히로시마여! 안녕!”이라는 글도 있다. 만일에 신국판의 판형에 300쪽 정도
내외의 책자로 출간해낸다면 나의 지금까지 쓴 글들은 20여권에 해당된다. 거기에 20여
년간 이어온 나의 음악활동은 그 일부분이 동영상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우주신앙에
관한 특강과 오케스트라 지휘한 음악활동들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
두가 다 나의 삶의 흔적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나는 이 시대에 이 공간에 속해 있
지 않은 상태로 처신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의 흔적은 미래의 어느 때를 예비
한 것 들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지
혜도 폐하고, 사랑도 폐하고, 권세도 폐하고, 부유한 재산도 다 없어지는 것들이다. 그러
나 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지금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 자로서의 삶의 흔적이 훗날 없
어지지 아니하고 기억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외계인
처럼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다가 나의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무
리를 지으려고 하는 나의 스스로의 이야기는 내 자신을 위하여서는 “외로운 자의 음성”
으로 일관된 글이나 먼 훗날 자기네들의 시대를 예비한 사람이라는 인정이 보여질 때에
는 나는 외로운 자가 아닐 것이다. 미래의 그 이름모르는 이들과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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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영혼이겠는가? 영혼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오직 파장일 뿐이다. 우리들의 영혼
이 파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파장을 대표하는 분야는 음악이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음악이 가장 중요한 화폐일 것이다. 바하, 베토벤, 모챠르트, 슈베르트, 쇼팽,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챠이코프스키 등은 영혼의 세계에서 대재벌일 것이다. 그들은 작
곡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부유한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
고 그 다음의 부유한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하고 감상하고 음악을 가까이 한 사람들일 것
이다. 지상에서 돈이 많아 부유했던 사람들이 음악을 모르면서 살았다면 그들은 영혼의
세계에서는 걸인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존재임으로 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작곡을 못하면 악기라도 연주를 해야 한다. 악기를 연주할 형편이 못되면
반드시 음악회에 가거나 동영상을 통하여서 음악에 심취하는 생활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파장이 곧 화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
양하라는 말이 자주 보인 것이 아닐까? 다윗과 솔로몬은 이 지상에서 부족할 것이 없이
살았던 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음악에 갈급한 인생을 살았다. 그들이야말로 영혼의
세계에서 풍요로운 존재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 나의 노년시절에서 해야 할 일
은 오로지 음악 뿐이다. 음악을 하다가 나의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물론이요 저 세상 곧 영혼의 세계 “의인들의 회중”에서도 가장 보람있는 존
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 아래서 보면 돈으로부터의 부귀영화, 권세로 얻은 큰 명
예, 각종의 노력으로 얻은 장수비결…..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하챦은 그리고 부질없는 물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생은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
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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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었다. 이러한 나의 할아버님은 젊은 시절에는 간척사업으로 토지를 새로 얻어서 부
자가 되신 분이다. 북한의 용천의 다사도 연안을 거대한 방파제로 막아서는 토지를 간척
하셨다. 그리고는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하여서 담수를 만들어 새로 얻은 토지에서 경작
이 가능하도록 일제하에서 전문인력을 동원하였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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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도 하여서 뉴욕상공에서 날고 있는 독수리의 눈알에 명중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
셨다. 달도 움직이고 지구도 움직이고 엄청난 거리를 지나서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는 달에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실을 비유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할텐데 그만큼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불가사이한 일을 미국
의 나사에서 지금 행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나에게도 그러한 비유가 적중하는 이야
기로 들렸다. 나의 할아버님은 그만큼 형이하학의 발전에 심취되신 분이었다. 항상 나에
게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아니면 기계공학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님을 통하여서 자연과학과 공학분야에 관한 관심을 도외시 하지 않는
가운데 아버님의 철학과 윤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꾸어 나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
는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가지를 더 첨언할
내용이 있다. 우리는 6.25 동란이후에 1958년경 성동구 신당동의 일본인들의 저택 (적산
가옥)에서 살았다. 그곳은 당시로서는 고위관리나 사업에 성공한 부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한여름 더운 날씨에 할아버님께서 저녁때에 집에 들어 오셨다. 그런데 깊은 시름의 한숨
과 함께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거 큰일이 났구나! 우리는 당장에 여기를 떠나서 이사를
가야 하겠다. 바로 우리의 건너편 앞집 (일명 대사관집)의 외교관 저택에서 무슨 파티인
가 하는 모양인데 댄스라는 걸 하더구나. 젊은 남녀가 아예 배를 꼭 가져다 대고는 덩실
덩실 춤을 추는데 오늘밤에 무슨 일이 생겨날 거 아니겠냐? 이러한 퇴폐된 동네에서 속
히 이사를 가야겠다.” 우리집 바로 건너편에는 여러 나라에서 대사를 지낸 분이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담이 낮아서 거실에서 춤추는 장면이 넘겨다 보였던 모양이다.
할아버님은 미국으로부터 퇴폐된 생활풍조가 들어와 우리 사회에 편만하게 될 것을 심히
우려하신 경우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윤리관에 젖어 계셨던 할아버님은 우리 집안의 가
정교육에 매우 엄격하신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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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분야에서 성실한 인생을 영위하여 온 것이 분명하다. 형이상학, 형이하학, 음악예
술….. 이 세 분야에서 나는 전문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혼신의 노력을 기우려 나의 최
선을 다하여 연구하였다. 지금도 나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나에게 정
년퇴직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음악예
술에 대한 나의 관심사가 더 첨예하여졌다. 우주물리학, 우주입자물리학, 양자물리학, 양
자역학, 생물학, 의학 등 나의 관심사는 넓은 영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음악예술에만 몰입하고자 한다. 나는 그 동안에 지휘를 많이 하였다.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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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전과 오후에 두 번씩 리허설을 하여 총 6회의 리허설을 하였다. 그래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계속해 나의 지휘하는 노력과 함께 하였다. 사실로 나의 음악이 우주로 퍼져나
가면서 “듣기 좋은 음악”으로 천상의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 내 자신에게
물어보게 된다. 어떻게보면 바하, 모챠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모두 다 아마츄어 음악가
였는지도 모른다. 만일에 정규음악대학을 다녀야만 프로급의 음악가라고 한다면 그들은
음악대학을 다닌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음악교육기관이라
고 하는 것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음악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사사하여서
음악을 배운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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