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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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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젊은시절 [1]: 학창시절 (1959-1965)

1959 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9 년 전 3 월 5 일 나는 연세대학교의 노천극장에서


입학식과 신입생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였다. 그날 총장님이신 백낙준박사님이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스탠리 죤스(Stanley Jones)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예식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사람이 유창한 영어로 학위수여식을 거행하는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백낙준박사님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해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서는 연세대학교의 어학연수원의 영어과정을 위하여 과외로 수강신청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음영교육센타(Audio/Visual Education Center)"에 동아리 과외활동에 참가


하였다. 거기에서는 각종 오디오 기기를 제작하고 또 녹음하고 영상물 제작하는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 당시에 황극찬이라고 하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님이 이미 연세대학교의
음영교육센타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선배님의 특별한 배려로 스테레오 앰프를
제작하는 일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에는 진공관을 사용한 음향기기들만 있었다. 일본
소니 (Sony)회사에서 소형의 트랜지스터가 새로 출하된 직후이긴 했지만 연세대학교의
시설에서는 오직 진공관앰프만 사용되고 있었다. 나는 몇 해전에 여의도에서 재개발하는
아파트에 잠시 거한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내가 진공관앰프를 만들었는데 자금이
없어서 좋은 스피커를 연결할 수가 없었고 또 임피던스의 수치가 맞지 않아서 원하는
좋은 소리는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자회로를 내가 스스로 디자인하여서 납땜을
해가면서 테스터로 저항의 수치를 재고 어려운 수작업을 감행한 이후에 앰프는 완성
되었다. 일단 소리가 나기에 오실로스코프로 음역과 음량 등을 정확히 테스트하고 나면
실험했던 회로들을 모두 다 다시 연결하여서 완전한 제품의 수준으로 회로전체를 철저히
납땜작업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한계로 인하여서 그 앰프는 도중에 그만 둔
미완성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지금은 분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또 만들면 된다.
나의 그러한 소양은 연세대학교에서 전공과목인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과외
활동에서 연마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시간만 있으면 나의 원하는 전자회로를 가지고 진공관앰프를 직접 제작


하고 싶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완성해보려고 한다. 이는 나의 취미들
중에서 흥미를 아직도 잃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학창시절에서
과외활동을 많이 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아이디어"나 "HQ 여행" 등의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여서 자신의 과외활동을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을 나는 권한다. 디지털 카메라를
하나 구입하여서 친구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산천이 수려한 자연을 사진예술에 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 차후에 외국에 유학을 가서도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연세대학교 학생시절에 나는 음악대학의 피아노 연습실에서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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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연습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음악대학생인줄로
알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는 대학교 1 학년 시절에 이미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물론
아버님의 개인지도의 덕분이었다. 지금의 을지로입구의 롯데호텔은 옛날에는 “반도호텔”
이었다. 거기의 1 층과 2 층을 "아이젠베르그(Eisenberg)"라는 오스트리아계의 유대인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대통령과 박정희대통령 초기에 국가의 경제개발에 큰 공헌
을 끼친 사업가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나는 아르
바이트를 하여서 연세대학교의 사립대학등록비 전액을 마련하여 공부하였다. 그때에
아이젠베르그는 나의 독일어실력에 탄복하였다. 그는 대학교 공부를 좀 미루고 자기의
사업을 도와주게 되면 나중에 독일에 유학 보내서 무슨 공부든 다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
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연세대학교에 계속
다니기로 결심 하였다. 나중에 독일유학때에 나는 아이젠베르그로부터 몇 번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연세대학교의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였고 또
독일어도 회화를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어학실력을 닦았었다. 어학실력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도 나는 어학실력 때문에 나의 사회활동을 지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 나이가 되면 아무도 사회에서는 함께 일하고자 하지 아니한다. 많은 박사님들과


교수님들이 은퇴하면 그날부터 사회에서 소외되어 할 일이 없게 된다. 그냥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서 연구한다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학자들이 대 부분이다. 어느 누가 그들
에게 사회생활에 함께 하자고 제안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학실력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만큼 어학능력은 평생토록 중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 퇴직이 없는 분야는 어학능력을 가진 경우와 음악가로 대가가 된
경우 밖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아르투어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이 90 세에 뉴욕
에서 런던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런던심포니와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였다. 그를
늙은이라고 연주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청중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꽃다발을 받고 경의로운 순간을 체험하다가 세상을 마치신 분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어학공부와 음악공부를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독일어메일을
보내고 또 영어로 편지를 쓰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다. 이는 이미 연세대학교의 학창
시절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군복무의 문제가 대두되자 나는 ROTC (Reserved Officer Training Corps)의 제 1 기생


으로 연세대학교 3 학년과 4 학년 2 년 동안에 여름방학 때에 12 주를 철저한 육군장교
훈련으로 보냈다. 물론 학기 중에는 군사교육을 따로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1963 년에
신학과를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육군소위에 임관되었다. 나의 연세대학교
의 4 년 동안에 나는 신학, 철학, 어학에 집중하였고 과외활동으로는 음영교육센타에서
음향과 방송과 전자기기제작 등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피아노연습을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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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하였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그 당시에 Canon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예술을 배우는
데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폭넓은 학창시절에서 나는 비교적 많은 친구들과 선배
들과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지금 내가 나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학의 학창
시절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기 위함이다. 중고등학교시절에야
별로 인상에 남을 만한 일이 없지마는 대학교의 학창시절은 평생을 두고 생생한 기억
으로 남아 있게 된다.

1963 년 2 월 말에 나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동시에 육군소위에 임관되었다. 그때의


군번은 233724 였다. 육군소위 ROTC 제 1 기 233724 라고 하면 나의 당대의 군복무
기록이 다 국방부 데이타베이스에 저장되어 있다. 나는 전라남도 광주 근교의 상무대
에서 육군소위 OJT (Officer's Job Training) 훈련을 6 주간 받았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보병장교의 전문적인 유격훈련이었다. 그러한 훈련도중에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가장
힘든 훈련은 1 주일간 산에 고립되어서 식사를 못하는 경우의 훈련이었다. 나중에는
뱀장어를 살아있는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칼로 껍데기를 베껴서 산채로 짤라
먹었다. 전시에 포위를 당해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적어도 1 주일은 견디어내야 하는
특수훈련이었다. OJT 의 훈련을 마친 다음에 나는 최전방 강원도 화천의 제 15 사단
3 연대 4 대대 2 중대 2 소대의 소대장으로 부임되었다.

나는 소대장으로서 매일같이 특수훈련에 임해야 하였다. 그리고는 최전방의 GP (Guide


Post) 초소의 근무를 했는데 그 당시는 북한의 인민군들이 GP 에다 수류탄을 던지는
사고가 발생하곤 하였다. 또 그곳은 밤중에 인민군들이 초소로 접근하기도 하는 매우
위험스런 지대였다. 거기에서 나는 소대장으로 밤에는 GP 들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돌았다. 나는 그때에 나폴레옹을 생각하였다. 나폴레옹은 평생 4 시간 이상 잠을 자본
일이 없다고 했는데 밤중에는 반드시 최전방의 초소들을 방문하여서 전방위대의 병사
들을 직접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되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방 초소인 GP 를 밤마다 순찰하곤 하였다. 나의 소대원들은 나를 무척도 존경했고
또 사랑하였다.

그런데 야간 기동훈련도중에 차량의 전복으로 인해 내가 30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던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사고로 죽은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나는 그때에 뇌진탕을
당했는데 후유증으로 간질병 증세처럼 발작하는 현상이 생겨나 급기야 서울의 수도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때에 김기석교수님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대고문
으로 위촉되어 계셨다. 박대통령의 전용 찌프차 “관 1 호”의 번호판을 달고 화천까지
오셔서 나의 병세를 확인하고서는 서울로 후송절차를 밟으신 것이다. 서울 수도육군
병원에서 6 개월간 가료한 다음에 차도가 생겨서 나는 원대복귀를 희망하였다. 형님들은
의병제대 할 수 있는 기회이니 군복무를 그렇게 마치고 해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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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화천의 15 사단으로 복귀하기를 원했다. 김기석교수님이 박정희 최고회의장과
의논한 결과 후방에 남도록 조치해 준다고 하셨다. 나는 그것을 완강히 반대하고 전방
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박대통령이 직접 친서를 원주의 제 2 군사령관 한신장군 앞으로
보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원주의 보충대에서 재발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신
사령관이 부른다기에 사령관실로 갔다. 그때에 한신장군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고
하시면서 나의 책임감과 애국심에 감동하였으니 원주의 하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여서 나의 병역의 의무를 다 마쳤다.

그런데 그 보잘것 없는 하사관학교에 나치독일 때에 군사훈련이 상세히 기록된 독일어


문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독일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했던 사람이 그러한 문헌들을
가지고 와서는 하사관학교에 비치토록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에 독일어 해독능력이
있었다. 거기에서 열심히 책들을 읽는 동안에 독일에 대한 이상스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밤을 지새워가면서 독일어 책자들을 읽었다. 그리고는 평생토록 나치독일에
관하여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마음에 담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나는 나치독일에
관한 연구로서는 당분간은 국내에서 유일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최근에 나는
“제 3 제국의 흥망성쇄사”라는 단행본의 원고를 탈고하였다. 원주하사관학교 때로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때에 나에게 남겨진 강한 나치독일에
관한 인상은 독일유학중에 생존했던 나치수뇌들을 만나서 직접 인터뷰하고 그들로부터
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오늘날 훌륭한 연구의 결과를 남기게 된 것이다.

2. 나의 젊은시절 [2]: 독일유학기

나는 1965 년 4 월에 2 년간의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하였다.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인해 심한 편두통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나는 지금의 한양대학교 부근의 한영고등학교의
교목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에 나는 독일로 유학할 결심과 함께 독일의 대학에다
직접 독일어로 편지를 보내는 일을 서둘렀다. 독일대사관 직원으로부터 독일어 움라우트
(Umlaut)가 있는 독일어자판의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하여서 거의 완벽한 독일어 문장으로
편지들을 보냈다. 제일 먼저 보낸 곳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이었다. 대학의 사무실에서
친절한 답장과 함께 학교안내 브로셔를 보내왔다. 그런데 당시 김기석교수님은 세계
도덕재무장 (World Moral Rearmament, MRA)이라는 회의에 참석차 스위스의 코(Caux)에
가셨다가 독일의 하이델베르그대학 철학과를 방문하여서 카알 뢰비트(Karl Loewith) 교수
를 만나고 돌아 오셨다. 나에게 독일유학을 권유하시면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등록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한영고등학교에서 나는
교목으로 성실히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6 년 8 월 22 일 나에게는 그토록 갈망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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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유학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나의 건강상태는 정상이 아니어서 어머님께서 무척도
걱정을 하셨다. 그 당시에 나는 지금은 이혼한 김수정 (피아니스트, H 음대 교수로 재직
하다가 은퇴: 가명)와 결혼하여서 독일로 떠났다. 집안에서는 그래도 누군가 보살펴 줄
사람이 있으니 안심하고 유학을 떠나 보낸다고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독일의 학제를 잘
알고 계셨고 학비가 없고 학생에게는 특별한 건강보험이 주선되어 있음도 알고 계셨다.
독일로 떠나던 날 아침에 아버님께서 나와 독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너는
지금 신병으로 고생하는데 치료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 국내에서는 우선 치료
가 불가능하고 또 가능하드라도 보험제도가 없어서 개인의 비용으로 의료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국내에서의 치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독일에 유학생으로 가서 독일의
발전된 보험제도와 의료혜택을 받으면서 거기에서 장기간 동안 치료를 받도록 하여라.
몸이 건강해지면 성공해서 귀국하고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게 되면 독일에서 너의 생을
마치는 수 밖에 없겠다". 이는 나에게 비장한 결심을 하라는 뜻이었다. 어머님은 도저히
그런 생각으로 아픈 자식을 독일에 보낼 수는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매우
냉정하시고 또 합리적인 사유를 하시는 철학자이시라 나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는 그때의 비장한 결심을 지금도 그대로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 내게서 죽고 사는


문제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독일에서 나는 두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일이 있었다. 유학한 그 해 11 월에 베를린
에서 발작증세가 생겨나 고생했는데 다행히도 베다니병원내에 거주했기 때문에 쉽게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두 달간의 입원치료에서 나는 한 푼도 돈을
내지 않았다. 전액이 학생보험금으로 다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게는 신비스런
일이었다. 과연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구나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 후에 다시는 발작
증세는 일어나지 않았고 심한 편두통만 남았다. 그 편두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머리를 때리는 습관이 들게 된 것이다. 나의 인생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비장한
결심을 나는 25 세 때에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결심으로 용감히
살아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의 정신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그렇게 나는 용감히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의 정신력으로
나는 나의 몸의 상태를 제압하고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고혈압과 치통으로
고생하지마는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아주 심하면 진통제를 복용한다. 그것을 먹으면
통증을 조금 잊기는 한다. 그러나 내가 믿는것은 나의 몸이 적정한 시간이 흐르게 되면
치통이나 고혈압을 스스로 치료해 주는 이를 테면 내 몸에는 자정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나의 몸안에 함께
소프트웨어로 넣어 주신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어떤 인간이라도 감히 나의 몸에 칼을
대고 청진기를 대고 컴퓨터 단층촬영을 하는 것을 나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만일 정히 그런 과정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는 경우라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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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나의 생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택하면 된다. 니체가 말하는 스스로 멸망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높은 수준의 인격체인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66 년말로 기억한다. 윤이상선생님이 내게 음악회표를 두 장을 주셨다. 빌헬름 켐프


(Wilhelm Kempff)가 베를린 예술원(Akademie der Kuenste Berlin)에서 바하(Bach)의
골드베르그변주곡(Goldberg Variation) 전곡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때에
김수정과 함께 갔었다. 내 실력에도 깨끗이 칠 수 있는 테마(위안의 노래)를 다른 음을
내는 실수로 매우 지저분하게 쳐서 첫 번에는 실망하였다. 그러나 켐프는 대수술 후에
2 년 만에 무대에 선 것임을 알았다. 그는 무척도 긴장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제 1 변주곡
에서부터는 그의 피아노연주는 주옥같은 음색의 완벽한 경지였다. 나는 지금도 그
연주의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나는 김수정을 위하여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살 결심을 하였다.

1967 년 2 월 7 일 Steinway B 모델 그랜드 피아노 새것을 사서 베다니병원 강당에


가져다 놓았다. 윤이상 선생님이 보증 서시고 60 개월 활부로 구매가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1 년 후에 아이젠베르그의 도움으로 나머지 금액을 일시불로 다 갚았다.
그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의 대금은 17,200 마르크였다. 당시 벤츠스포츠카 한대의
값이었다. 윤이상 선생님은 우리에게 베를린시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알선해 주셨고
베다니병원 기숙사를 교섭해주신 다시없이 고마운 분이었다.

1967 년 3 월부터 시작된 봄학기에 나는 독어를 잘 이해하지 못해 EDPS (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의 수강신청을 하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IBM 의 Programmer 의
전문과정을 밟게 되었다. 가을학기에는 자유대학 전산실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1500 마르크의 월급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스타인웨이
활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별 어렵고 고된 아르바이트를 다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서 나는
컴퓨터정보 기사가 된 것이다. 피아노 활부금을 갚아가는 일이 그때부터는 수월해졌다.

1967 년 말에 나는 베를린 자유대학의 전산실에서 프로그래머로 열심히 일 하였다. 어느


날 체룰라(Zerulla)교수가 새해 초에 함부르크에 갈 일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지시
받은대로 두명의 독일인 프로그래머와 함께 함부르그 시청으로 보내졌다. 거기에는 독일
전 지역에서 프로그래머들이 모여들었는데 약 100 명이었다. 나도 그들 중에 하나였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지를 못하였다. 함부르그 시청의 전산화 작업을 위하여 전국
프로그래머 컨테스트가 행해진 것이었다. 문제를 받으면 프로그래밍을 곧바로 해야 한다.
프로그램언어는 코볼(COBOL)이었다. 예선에서 100 명중 20 명이 뽑힌다. 다음단계에서는
10 명이 선발된다. 최종 본선에서는 5 명이 선발되는데 1, 2, 3 등에게는 메달이 주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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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등은 디플롬(Diplom)이란 증서만 받는다. 내 독일친구 두 명은 예선에서 떨어져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나는 본선에 올라갔는데 5 등을 하였다. 본선에서의 꼴찌였다.

나는 낙심한 채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창피해서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체룰라교수가 나를 황급히 불렀다. AEG 전기회사에서 나와 고용계약을 맺자고 찾아
왔다는 것이다. 전자신문에 내 이름이 보도가 되었고 자유대학 전산실 프로그래머로 전
독일에서 5 명중 하나인 실력있는 프로그래머라고 한 기사를 들고 왔다. 이렇게 하여
나는 AEG Telefunken Rechenzentrum (전산실)에서 5 년간을 프로그래머/시스템분석가
(Programmierer-Systemanalytiker)로 근무했는데 월급이 2500 마르크였다. 당시 공학박사
월급이 3000 마르크정도였다. 그때부터 나는 비교적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분위기에서
유학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나는 AEG-TELEFUNKEN Rechenzentrum(전산실)에서 열심히 일 하였다. 컴퓨터의 모국어


인 기계언어 어셈블러 (machine code assembler)를 IBM version 으로 마스터 하게 되었다.
그리고 COBOL 과 FORTRAN(formular translator, 고등수학 프로그래밍언어)에 나는 정통
해 있었다. 무슨 일에나 관심을 극대화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 나는 최단시간내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실력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와 함께 프로그래머로 일한 사람들 중에
위르겐 에버스(Juergen Evers) 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3 년 전부터 그 전산실에서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그는 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에버스박사(Dr. Evers)라
불려졌다.

그 분이 나의 실력을 인정하여서 자기 밑에서 일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기업경영에 있어서의 유동적인 기획에 관한 의사결정을 위한 총체적인 정보처리
시스템"이었다. 에버스박사에게는 자기의 박사학위논문의 이론을 실현하기 위하여서
독창적인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개발코자 하는 구상이 있었다. 거기에는 복잡한 수학공식
들을 프로그래밍 해야하는 필수과정이 들어 있었다. 당시 FORTRAN 언어로 프로그래밍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나간 과거 3 년간의 기업정보를 총체적으로 저장하고
현재의 1 년간의 정보를 비교 분석하여 2 - 3 년간의 미래의 기업경영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동성 있게 기획하는 방대한 정보처리시스템이다. 독일어로는 “Integrierte
kaufmaenische Datei für das flexible Programmierungssystem” 이다. 1969 년 말에 나는
에버스박사와 이 마법의 신 기업경영 소프트웨어패키지 개발을 시작하여 1972 년에
완성하였다.

갑자기 AEG Telefunken Rechenzentrum 에서 그런 환상적인 시스템을 개발하였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SIEMENS 회사의 중역간부들이 우리를 찾아와 자기네들을
위해서도 그런 시스템을 개발해 달라고 하였다. 에버스박사는 나를 단독으로 지멘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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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하였다. 지멘스전산실에서 나는 열심히 성실히 일하여 1974 년에 같은 시스템을
가동할 무렵 1974 년도에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공항시대가 열렸다. 오일값이
치솟아 대그룹에서 정보처리를 수작업하는 수준에서는 민첩하게 유동성 있게 기업경영을
할 수가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AEG Telefunken 과 SIEMENS 에서는 컴퓨터에 의한
순발력 있는 정보처리 및 의사결정 시스템을 가동하여서 환경변화에 대하여 민첩하게
대처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Evers/Kim 의 그 시스템은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던 AEG Telefunken 은 그 당시의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난을 겪게 되었는데
TELEFUNKEN 회사는 프랑스에 그리고 AEG 는 스웨덴의 ABB 전기회사에 각각 인수합병
되었다. 그러나 SIEMENS 는 아직도 건재하여서 세계적인 독일기업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서 나의 컴퓨터 시스템 개발과 프로그래밍의 흔적은 지금도
독일에 남아 있다.

나는 1970 년도에 들어와서 내 인생에서 최대로 행복한 때를 맞이 하였다. 1970 년에서


부터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나는 소상히 기억한다. 지금 나는 나의 "자서전"에 해당
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취리히의 페스타롯치 동상의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져 있다.
"하인리히 페스타롯치는 평생 자기를 위하여서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이다." 나 역시 그렇게 내 자신에 대하여는 망각하고 살아왔다. 그저 남을 위하여서 나의
관심과 실력과 능력을 바치곤 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모든 인생의 열쇠는 내가 내 자신의 현재에 대하여 얼마나 충실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1970 년은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해였다. 컴퓨터 시스템으로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기업경영의 합리화에 적중하는 방대한 시스템을 나는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유대학에서는 나의 철학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언간 나의 독일어
실력도 많이 향상되었다. 강의를 이해하고 논문을 쓰고 또 말하고 듣는 것이 거의
독일인들 수준에 미치는 정도가 되었다. 서 베를린 자유대학교 (Freie Universitaet Berlin-
West)의 철학과에는 하이덱가의 직계제자 빌헬름 바이쉐델(Wilhelm Weischedel)이 강의
하고 있었고, 신학과에는 헬무트 골비쳐(Helmuth Gollwitzer)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강의
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니체 세미나에 등록하였다. 뮐러-라우터(Mueller-Lauter)
교수는 하이덱가와 바이쉐델 두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지도받은 분이다. 그리고
니체의 전집을 새로 간행해내는 편집장이기도 하였다. 나의 지금의 니체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바로 뮐러-라우터 교수로부터 전수받은 내용이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1970 년 두 학기 동안에 나는 저녁시간의 니체 세미나에 결석하지 않고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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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베를린 음악대학에서는 작곡, 지휘법을 수강하였고 피아노렛슨도 받았다.
집에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연습할 수가 있었다. 또
베다니병원의 간호사 기숙사로부터 나와서 베딩(Wedding)지역의 Kiautschoustrasse 4
번지에 매우 넓은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를 갔다. 천정이 4 미터나 되는 높은 방이 네
개가 있고 한방은 넓고 커서 거기에다 그랜드 피아노를 놓았다. 한 밤중에 연습을 해도
방해된다는 사람이 없는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5 년간 행복하게 살았다.

낮에는 AEG 전산실(Rechenzentrum)에 출근하여서 정상적인 회사원처럼 일하고 비교적


높은 대우를 받았고 저녁시간 (오후 6 시부터 9 시까지)에는 자유대학에서 니체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그러한 중에서 1970 년이 어떻게나 빨리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런데 경제적
으로 풍요롭고 자동차도 가지고 있다 보니 여행이 자유로워져서 나에게는 나치독일 때에
히틀러 밑에서 활약했던 수뇌들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분들을 찾아가 직접 면담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과거 원주하사관학교 때로부터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나치독일역사
에 관한 연구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과 거의 유사한 승전
연합국들이 분단된 독일 내에서 금지시킨 법이 있었다. 그것은 독일국적을 소유한 사람
이 서독인이든 동독인이든 나치독일에 관해서 연구를 한다든가 또는 히틀러에 관해
숭배한다든가 하면 재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옥에 투옥하여서 형을 살게 하는 극단의
보안법이 있었다. 그래서 독일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나치독일에 관하여 연구를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나치독일에 관하여


연구할 수가 있었다. 1970 년에 나는 아주 중요한 나치독일 당시의 물리학자 두 명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함부르그대학의 카알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Karl Friedrich von
Weizsaecker) 교수님과 당시 뮌헨대학교수와 막스 플랑크 연구소소장을 겸임하셨던
베르너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교수이다. 내가 두 분을 다 존경했지만
하이젠베르그 교수님은 피아니스트로서 더 내게는 돋보이는 학자였다. 그리고 양자
물리학의 대가였다. 그들을 통하여서 히틀러 때에 독일의 핵물리학의 수준과 또 양자
물리학에 관한 개전 등에 대한 소상한 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분네들은 내가
나치독일에 관한 전문적인 질문을 할 때에는 거의 회피하는 인상을 주었다. 별로 나치
독일의 역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보안법
에는 독일사람들이 나치독일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도 위반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나는 나치독일에서 얼마나 철저히 학문을 지원하고 뒷받침
했던가 하는 배경이야기는 잘 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독일은 결코 원자폭탄을 개발
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대신 핵에너지를 개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내가
독자적으로 나중에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히틀러 생전인 1943 년과 1944 년에 핵실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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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예가 있었다. 한번은 오르드루프(Ohrdruff)에서 우라늄폭탄의 핵실험(1943)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뤼켄(Ruecken)에서 플루토늄폭탄의 핵실험(1944)이 있었는데 모두
다 성공적이었다. 그러면 핵폭탄의 운반기술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궤도비행 폭격기)도
다 개발되어 있었는데 왜 핵폭탄을 미국에 던지지를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지금도 풀려
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핵실험을 지켜본 히틀러가 절대로 그러한 대량살상무기는 사용
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핵폭탄 대신에
“잠재우는 폭탄 (Schlafbombe)”를 개발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은 20 일 동안은
금식한 상태에서 건강이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적군을 20 일동안 잠을 재우고서
일정한 장소에 가두고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에 깨어나면 항복문서에 조인하도록 하면
전쟁은 수월하게 승리로 끝나게 할 수가 있다는 확신을 히틀러는 참모들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과거의 히틀러와 가까웠던 참모들로부터 인간의 목숨이나 많은 문화전통
시설물들을 파괴시키지 않고 승전할 수 있는 방법은 “잠재우는 폭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1970 년대에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자유롭게 되자 핵과학에도 심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음악공부에도 단순한 아마츄어로서가 아니라 전공하는 음악도처럼 열심이었다.
바로 그때에 윤이상선생님은 동백림사건으로 인해 한국에 강제송환되어서 사형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루고는 1969 년 말에 독일로 귀국하셨다. 1970 년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베를린 예술대학의 교수로 부임되셨다. 나는 윤이상선생님과 다시 긴밀한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인 배경에 대하여서는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이북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평양에 자주 왕래하신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윤이상선생님은 그때에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국에
오랜만에 돌아가 멸시를 당하고 법정에 서고 사형언도까지 받았는데 내 마음속에 '나의
조국'에 대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셨다. 진정한 의미의 조국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신 말씀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3. 나의 젊은시절 [3]: 독일유학 중 컴퓨터정보기사로 활약

1971 년은 내가 30 세가 된 해이다. 나는 그 당시에 나의 인생의 중턱에 올라온 기분으로


느꼈다. 독일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고 내 나름대로 전산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고
또 학업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 뿐인가? 내가 원래 계획했던 나치독일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도 시작되었다. 핵물리학, 철학, 신학, 음악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이
정도면 나의 30 세의 인생에는 많은 열매들을 맺은 때였다. 나는 그때에 나의 인생설계
를 새로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유인으로 살아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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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당시 결혼생활에서 김수정 위주의 생활에 많은 혐오와 부담과 허탈감 마저
생겨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971 년 우리 두 사람의 유학생활에서는 5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김수정은 서 베를린 음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또
그뿐인가? 약 6 회에 걸친 피아노독주회 그리고 3 회에 걸친 오케스트라 협연 그리고
콩쿨대회(Busoni 와 Viotti 콩쿠르)에 참가하였다.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그 다음으로는
마스터코스에도 여러번 참석하였다. 타트야나 니콜라이에바(Tatjana Nikolajewa)와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의 마스터코스는 매우 중요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기회
이기도 하였다. 그의 뒤를 내가 100%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나는 김수정의 자기표준의
인생대로만 살아가야 하였다. 나는 나의 인생설계를 새롭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전제
조건이 결혼생활을 과감히 청산하는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아직 어린 애기들이 생기지
않았을 때에 이혼하는 것이 가장 절호의 기회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마침 김수정이
런던으로 이주하여 알프레드 브렌델에게 장기간 사사하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하고 생활비를 대어준다고 약속하였다. 6 개월간 런던으로 생활비를 보내주고 또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도 보내주기로 하였다. 6 개월 이후에는 김수정이 자력으로
런던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할 기회를 얻어 생계를 유지하겠다고 말 하였다. 그러면서
나도 영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는 일단은 김수정의 영국생활부터 실천에 옮겼다.

나는 Kiautschoustrasse 의 큰 아파트에서 나와서 원룸 아파트를 얻고는 월세를 많이


절약하여서 런던으로 송금해 주었다. 나의 그때의 혼자서 독거한 그 시간은 내게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나도 가끔씩 런던으로 가서 김수정을 만나보고 격려도 해주고 돈도
많이 주고 돌아오곤 하였다. 내가 혼자 있게 되니 나에게는 천상의 생활처럼 조용하고
무슨 일에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로 느껴졌다. 나는 그때에 내 독자적인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쓴 글이 "행복의 열쇠 (여인의 행복)"이라는 글이다. 그리고
나는 엄청나게 많은 독서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AEG 와 SIEMENS 의 두 전산실을
오가면서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다. 나는 또 마르부르그대학의 카베라우(Kawerau)
교수님을 찾아가 기독교의 동방전래사 (경교의 역사)의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뮌헨엘 자주 갔었다. 하이젠베르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또 연구과정을 구경하는 것이
큰 보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내가 그 당시에 혼자 생활하지 않았더면 지금의 방대한
지식을 소유하는 일은 불가능 하게 되었을 것이다. 두 학기의 니체 세미나를 마치고서
나는 베를린 교회에서 운영하는 루터교신학교에서 목사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로
인하여서 나는 독일어를 독일사람들처럼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만 2 년간을
목사과정을 마치고 국가시험에 응시하였다. 제 1 국가시험에 응시하고 나면 제 2 국가
시험을 응시할 수가 있는데 이 두 국가시험에 합격해야만 목사안수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런데 제 2 국가시험을 응시하려면 독일국적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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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국가시험을 포기하고 학적을 자유대학의 철학과로 옮겼다.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인
철학공부에 몰입하였다. 1970 년까지의 행복했던 나의 평범한 가정생활은 1971 년도
에서는 혼자 독거하는 처지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영위하는 인생을
설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보다는 내가 자유인으로서 나의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고자 하는 염원이 더 강했었다.

내가 독일에 도착한 1966 년 8 월말경 아버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너는


5 년간 공부하고 나서 귀국하여 50 년 일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말고, 50 년간 공부하여서
5 년간 일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30 세가 되어서
내 마음에 새롭게 결심하게 된 것은 75 세까지 공부를 해야 하겠는데 평범한 가정
생활에서 월급만 받고 휴가나 떠나서 즐기는 인생은 내 그 당시의 정서로서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감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김수정과의 어떤 의심스런
사랑에 관한 견해차이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위해 주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관계였다. 다만 내 편에서 나의 인생을 새로 설계하고자 하는 결단이
이혼이라는 결론을 내게 된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이혼한 것을 떳떳하게 말해줄 수가
있다. 이혼은 내 편에서의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수정에게는 인생에서 큰 고민과
쇼크가 된 줄로 알지마는 내게는 나의 새로운 인생설계를 위하여서는 불가피한 경우였다.
한 여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나는 가까운 나의
아내를 사랑했고 헌신적으로 그의 유학생활의 뒤를 보살펴서 음악가로 성공을 시켰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를 실현하는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나의 인생길을 독자적으로 걸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일에 동조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나는 이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수정은 나를
과소평가 하였다. 나의 피아노연습이나 지휘자로서의 소양을 가꾸는 일이 그에게는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되었다. 자기자신과 비교하게 되면 나는 음악에 대한 소질을
타고나지 못한 형편인데 무슨 음악을 하겠다고 하느냐고 늘 빈정댔다. 그리고 박사학위
도 끝내지 못하는 주재에 관심은 분산되어서 이것 저것 다 손대는 인생설계에는 자기는
동의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남들이 나를 무시해도 나는 내 자신에게는 가장 올바르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나의 인생설계에 대한 본격적인 변화는 내 자신에게는 다시 없이 큰 의미가 있었다.
내가 누구의 눈치를 보며 누구의 의견을 따라 내 주관을 이리저리 바꾸겠는가? 이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나의 인생설계를 과감히 새롭게 시작
하였다. 1971 년은 내게는 인생행로의 이변이 생긴 해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기도 하였다. 지금 나의 인생에서 내 처지에 대한 것은 이미
1971 년의 방향설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결코 지난날 나의 생각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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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하지 아니한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고 또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인생설계에 도전하는 것으로서 나의 인생행로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1971 년 말에
나는 서 베를린 북부의 모아빗 (Moabit)이라는데의 원룸으로 이사를 갔다. Wedding 의
Kiautschoustrasse 보다는 집세가 1/4 로 줄어 들어서 그 차액을 런던으로 송금해 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모아빗의 원룸은 나치독일 당시에는 감옥이었고 뒷마당에서는
사형집행도 행해진 곳이라 사람들이 임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값도 싸고 빈
원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1974 년까지 살았다. 6 개월간만 런던으로
송금해 주기로 했는데 김수정에게는 1974 년까지 매달 200 파운드씩 송금해 주었다.
런던에서는 물가가 비싸서 겨우 집세나 내는 정도밖에는 되지 아니하였다. 나머지
생활비는 본인이 피아노렛슨으로 벌어야 했는데 Alfred Brendel 렛슨비는 내가 별도로
송금해 주었다.

모아빗의 그 집은 알 수 없는 기이한 집이었다. 밤 12 시만 되면 복도를 걷는 구두


발소리가 나다가 내 방문 앞에서 그친다. 그런데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는 법은
없다. 혹시 누가 내 방 문 앞에 서있나 해서 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다. 분명 인기척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모두들 귀신들이라고 하면서 무서워했다.
한달 후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귀신들이 무섭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해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아마 그들에게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런던으로 보내고 나니 무척도 내 마음이 허전하였다. 나는 피아노


상점에 가서 푸헬트(Puchelt) 사장님께 의논하였다. "마누라를 런던에 보내놓고 마누라
없이는 살 수가 있는데 피아노를 런던으로 보내고 나니 피아노 없이는 못살겠다. 아무
피아노라도 좋으니 월세로 좀 빌려 달라"고 하였다. 푸헬트사장이 내 말에 감동 되어서
스타인웨이 B Fluegel 중고품을 그냥 보내주고 1974 년까지 전혀 세를 받지 않았다.
그때에 나는 피아노연습에 몰두 할 수가 있었다. AEG 로 출근해서는 Evers/Kim 소프트
웨어 패키지 프로그래밍에 열심이었고 퇴근해서는 철학과 신학공부에 몰두 하였다.
그러면서 간간히 피아노연습을 하였다.

1972 년 3 월에 나는 자유대학 철학과의 니체 세미나에 등록하였다. 뮐러-라우터(Mueller-


Lauter) 교수의 세미나였다. 가을학기에도 연장되는 세미나였다. 저녁 8 시에서 밤
10 시까지 두 시간이었다. 월수금요일에는 나는 니체 세미나에 충실히 참여하였다.
1972 년과 1973 년은 AEG System Programming, 철학세미나, 피아노연습으로 나의
하루의 일과가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Ford Taunus) 를 팔고 자동차
없이 2 년 동안 지냈다. 나는 신학박사학위 논문으로 “니체의 기독교윤리비판”을
제목으로 정하고 뮐러-라우터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다. 1974 년도에 나의 논문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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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학과에서 통과가 되지 아니했다. "신은 죽었다"고 외친자의 기독교에 대해 정면
공격한 내용이 신학박사 논문으로는 수락될 수 없다는 대다수교수들의 의견이었다. 나는
그 논문의 요약을 우리말로 써서 한국의 기독교사상 월간지에 계재 하였다. "니체의 허무
주의 이해"라는 제목이다. 네이버에 들어가서 "김정양 학술논문"으로 검색하면 누구든지
그 논문을 찾아볼 수 있다.

1972 년 9 월에 AEG Rechenzentrum 에서는 Evers/Kim System 이 완성되었다.


Prototype 의 그 시스템은 Testphase 에 들어갔다. 여섯번의 테스트와 수정끝에 Maintest
phase 에 들어갔다. AEG 의 고위직은 물론 베를린공과대학과 베를린시 당국의 여러사람
들이 지켜보는 중에 에버스박사(Dr Evers)는 신바람이 나서 시스템가동에 관해 설명
하였다. 환경변화에 따른 자유자재의 유동적인 기업기획이 가능했고 24 시간 내에 의사
결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도 대기업경영에 있어서 그러한 의사결정이 가능 하다면
획기적이다. Siemens 에서는 지금도 그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독일에서 니체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1970 년에는 니체의 일반적인 소개를 위한


뮐러-라우터 교수의 세미나였는데 두 학기였다. 월수금 저녁 7 시에서 9 시까지 였고,
1972 년에는 니체의 후기사상(Nietzsches Spaetphilosophie)이라는 전문적인 니체연구의
세미나였다. 역시 뮐러-라우터 교수의 두 학기 세미나였다. 월수금 저녁 8 시에서부터
10 시까지였다. 나에게는 모두 네 학기에 걸친 니체연구라서 매우 자세한 니체에 관한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뮐러-라우터 교수 밑에서 "니체의 기독교윤리에 대한 비판"
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974 년에 논문이 완성이
되었는데 신학과에서 통과되지는 못하였다.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라고 선포한
니체가 기독교에 대하여 정면적으로 공격했는데 그의 사상을 연구한 것은 신학박사
학위로 인정될 수가 없다는 대다수 교수들의 의견 때문이었다. 나는 논문을 수정하지
않고 박사학위를 받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필히 박사가 되어야 할 내 인생의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 년 10 월 3 일 독일의 통일이 세계만방에
전해지면서 서 베를린의 자유대학은 동 베를린의 훔불트대학으로 융합되었다. 그때에
나의 논문 “니체의 기독교윤리에 대한 비판”이 재론 되었고 1991 년 10 월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되어서 늦게나마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의 연구논문
들은 베를린-브란덴부르그 학술원의 학술지에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72 년 9 월에 Evers/Kim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1973 년에는 학위논문을


쓰면서도 Marburg 를 경유하여서 Muenchen 엘 자주 방문하였다. 마르부르그대학
에서는 Kawerau 교수의 "기독교동방전래사(경교연구)" 강의를 듣고 또 뮌헨에서는
하이젠베르그 교수의 양자물리학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Citroen Diesel CX
타입을 구입하였다. 장거리 운행에서는 아주 편리하게 만든 자동차이고 연비가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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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되었다. 매달 런던에 송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인생의 새로운 설계를 그대로 밀고
나갈 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의 월급은 AEG 와 Siemens 에서 동시에 받게 되어서
매달 5000 마르크의 수입이 있었고, 방세를 절약한 돈으로는 런던에다 송금하였다.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aecker) 교수는 함부르그의 교수를 사퇴하고 뮌헨
근교의 슈바빙(Schwabing)이라는 곳의 저택에서 오로지 조용한 가운데 집필만 하고
계셨다. 나는 뮌헨에 갈 때마다 바이츠제커교수를 찾아가 뵙곤 하였다. 서 베를린에서는
Siemens 전산실에서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은 나의 한 주일간의 주 업무였었다.

그 무렵 독일의 정부초청으로 우리나라의 국세청의 세무직원들이 독일의 세무제도를


배우고 또 훈련을 받기 위하여서 20 명이 독일에 연수 온 일이 있었다. 본(Bonn)의
정부에서는 나에게 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그래서 대우를
받아가면서 주말마다 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쳤다. 20 명 모두가 서 베를린의 외국손님이
거주하는 영빈관에 머물고 있었다. 3 개월 동안에 나는 그들과 많이 친숙해졌는데 그들은
나에게 독일어 뿐만 아니라 오페라해설을 부탁하여 그들에게 오페라대본 내용을 알려
주고 공연에도 함께 가곤 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국세청 직원들이 나를 박학한 학자
그리고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한국사람으로 잊지 않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있다.
나는 언제나 무슨 일에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반드시 그러면
감동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하여서 1973 년이 또 빠르게 지나갔다.
나의 시간사용은 "생의 압축"을 가능케 하였다. 100 년을 10 년으로 그리고 10 년을
1 년으로 압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촌음을 아끼면서 그 해를 보냈다.
가끔씩 런던에 가서 김수정을 찾아보고 또 돈도 많이 주고 돌아오곤 하였다. Siemens 의
전산실에서는 나의 명예는 거의 우상화된 정도에까지 높아졌다. 그래도 나는 교만하지
아니 하였다.

1972 년과 1973 년은 내가 서 베를린에 혼자 독거하는 신세였지만 내 평생에 가장 많은


공부를 하였고 또 보람있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지금도 그때처럼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나의 결심과 집중력이 많이 약해졌는지 그 시절과 비교한다면 만족스런 생의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내가 집필을 끝낸 "제 3 제국의 흥망성쇄사"와
"다물논고 (Stromateis) 1"은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방대한 지식을 총정리한 것이다.
다물논고는 현재 제 2 권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다물논고는 총 삼부작으로 설계되어 있다.
하이젠베르그 교수가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한데 그는 주로 자기 딸 바이올린반주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CD 도 시중에 나와있다. 모챠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1 번 d minor, KV466 이다. 뮌헨에서 하이젠베르그 교수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자기딸과 함께 자주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자주는 못 가 보았으나
내가 참석하여 들은 바 그 분의 피아노실력은 전문가의 차원에 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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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이상, 하이젠베르그, 바이츠제커 등 많은 훌륭한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과
만났지만 한번도 그들과 사진을 찍자고 한 일은 없었다. 피터 막(Peter Maag)에게 4 년간
지휘사사를 받으면서도 사진 한 장 찍어놓은 것이 없다. 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이 재단을 설립할 때에 내가 기금을 내놓았기 때문에 직접 카라얀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가까이에서 만나 대화하고 악수한 일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광경을 사진을
찍고자 하지 않았다. 혹 어떤이가 사진을 찍었다고 해도 내가 필요하니 한 장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나는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과 사진을 찍고 그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덜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유명한 사람들이 나같은
무명한 사람과 찍은 사진을 내 보이면서 자랑할 것으로 생각되는가? 그들은 나와 사진
찍은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 중에 플로티누스(Plotinus)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1973 년에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플로티누스 연구의 대가인 기죤 (Olaf Gigon) 교수를 만나서 직접 강의를
들은 일이 있다. 플로티누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를 두루 다니면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선생님을 찾지 못하다가 그
당시로서는 아주 무명한 암모니우스 (Ammonius Sakkos) 라는 사람을 만나서 5 년간 그
밑에서 플라톤철학을 마스터 하였다. 그리고 훌륭한 학자가 되어서 아루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의 어머님의 가정교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황후가 플로티누스에게 여러번
물었다고 한다. 어느 선생님에게서 그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느냐고.... 플로티누스는
절대로 스승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처럼 한심한 사람이 스승의
얼굴에 먹칠하여 누를 끼치게 될 것이 염려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조금만 유명한 사람을 만나면 단 한번 만나서도 사진부터 찍고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선전하고 다닌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는 내
독사진조차 남아난 것이 없다. 나의 초상화는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걸려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과 만난 것은 나를 위해
고이 간직할 이미지일 뿐 결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절대로 사진으로 남기지 아니하였다.

1974 년 10 월에 나는 직장을 옮겼다. 그해 초에 이른바 오일쇼크가 생겨났다. 유럽에서


경제공항의 파동이 크게 일어나 일단 구조조정을 하는데 외국인 근로자들을 먼저
해고시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론 AEG 나 Siemens 에서는 나를 예외로 하여서
해고를 시키지 않겠지만 그래도 정부의 시책에 따라야 하는 경우에는 나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해고를 당하게 될 수 밖에 없으리라는 판단에서 정부의 공공기관인 서
베를린 노동사회청(Senat fuer Arbeit und Soziales West-Berlin)의 전산실(Rechenzentrum)
로 직장을 옮겼다. 대우는 AEG 나 Siemens 만 못했지만 나에게는 독일의 생활이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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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월 2500 마르크 정도의 대우였다. 역시 프로그래머
로서 공무원들의 복지사업 및 제 2 차대전의 피해자들을 보상하는 사업들을 전산화
하는데에 나의 폭넓은 시스템분석과 프로그래밍이 총동원 되었다. 나는 서 베를린 정부
기관에서 막중한 프로젝트의 리더의 자리에 있었기에 구조조정의 여파인 외국인 근로자
해고에서는 제외된 인물이 되었다.

독일의 친구들이 나의 순발력이 빠른 그리고 슬기로운 처세에 탄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모아빗의 감옥소를 개조한 원룸의 아파트에서 서 베를린 남부쪽인
Lichterfelde 의 독채집으로 이사하였다. 그 집은 노동사회청의 전산실의 총책임자가
야리우스(Jarius)라는 여자였는데 그의 개인 저택이다. 그 분이 이혼하고서 큰 3 층의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1 층에는 야리우스여사가 살았고, 2 층에는 나와 책상을 함께
놓고 일한 프로그램머 슈토쑨(Lotar Stossun)의 부부가 살았다. 나는 3 층의 다락방 두
개를 얻어서 거실과 침실로 사용하였다. 내게는 또다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슈토쑨(Stossun) 의 자동차로 함께 출퇴근을 하곤 하였다. 야리우스
여사는 나를 무척도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나는 또 그 분의 지시에 가장
충실한 충복으로 일을 하였다.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야리우스여사의
뜻대로 따르곤 하였다. 그분은 내게는 절대적인 존재이기도 하였다. 아주 미모가 뛰어
나신 분이고 인격이 고매하였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줄로 알고 1 층 거실에다가는 나를
위하여서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를 세를 내어 가져다 놓았다. 나는 시간이 나는대로
피아노 연습을 하였다. 내가 연습하는 것을 야리우스여사와 슈토쑨 내외가 항상 함께
앉아 감상하곤 하였다. 그래서 연습할 때에는 듣지말고 제대로 연주할 때에 들으라고
하면 그들은 어디가 틀렸는지 또 다시 반복하는지 전혀 모른다고 하면서 그저 듣기좋은
소리라서 앉아서 명상하면서 나의 피아노치는 것을 감상한다고 하였다. 자기네들을 의식
하지말고 열심히 연습을 하라고 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베토벤의 후기소나타 중에서 31 번 Op.110 을 연습하였고 슈베르트의


유작소나타 B flat major 를 함께 연습하였다. 약 6 개월동안 퇴근 후에 피아노연습을
하고나니 인템포로 제대로 외워서 칠 수가 있어서 Hausmusik 을 열겠다고 제안하였다.
노동사회청의 직원들 그리고 그 동네의 아는 사람 등 약 30 명이 모였다. 야리우스
여사는 샐러드 샌드위치 치즈 그리고 와인 등을 준비 하였다. 일종의 주말 파티이기도
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베토벤의 Op.110 전악장을 연주 하였다. 이미 롤로프 (Roloff)
교수에게서 렛슨 받아둔 바 있는 곡이었다. 노동사회청에서는 곧바로 소문이 나돌았다.
전산실에 프로그래머 중에 피아니스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 사회청에서
자선음악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그때에 모챠르트, 베토벤 그리고 슈베르트의
즉흥곡 등을 가지고 약 50 분 정도의 독주회를 가졌다. 서 베를린시의 직원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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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과의 행정관들 우리 전산실 직원 등 합하여 약 200 명이 청중으로 모였다. 홀의
좌석은 500 석이었다. 그리고 음악회가 끝난 다음에 간단한 다과가 있었고 모두들 나와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지어 내게로 오는 것이었다. 음악이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을 나는 그때에 비로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도 피아노
전공자가 아닌 전산실의 프로그래머가 연주하는 것이라 하여 더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내가 존경하는 하이젠베르그 교수의 피아노실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1974 년 성탄절 직전에 있은 일이었다. 그때의 나의 흐믓했던 기억은
지금 내 젊은시절을 회상하면 더 생생하게 나의 뇌리에서 그림으로 떠오른다. 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었고 더 똑똑했고 또 더 성숙되어 있었다.
지금은 나는 많이 전락되었다. 나의 삶이 지금처럼 무의미하고 덜되고 또 보람이 없이
영위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이상 나의 인생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을 정도이다.
사람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먹으면 그만큼 성숙하고 더 교양이 높아지고 더 점쟎아야
할텐데 내 경우는 그렇치가 못하다.

나의 30 대가 40 대보다 더 좋았고 성숙되어 있었다. 나의 40 대가 50 대 보다 더 보람이


있었고 훌륭하였다. 그리고 60 이 넘으면서 나는 인생에서 내리막 길을 걸어온 것이다.
지금은 최하위의 인생을 살면서 공부도 못하고 피아노 연습도 못하고 또 가난하고
인내심도 모자라고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고 인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 없는
한심한 늙은이로 변모되었다. 바로 그 과정이 악한 것이다. 어디에 악이 따로 있겠는가?
나의 전락되고 퇴보되고 있는 인생살이가 참 흉측하고 악한 상태임을 나는 지금
고백하고 싶다. 젊은이들이 인생의 말기에 지금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인생회고록을 남기면서 한치의 부끄러운 마음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또
지금 생각되어지는 그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 뿐이다. 나에 대한 평가와 인정은 내
자신의 몫이 아니다. 아마도 나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 지금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을
소상히 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리라 믿는다. 나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16 세기의 문예부흥을 르네쌍스(Renaissance)라고 한다. 나에게도
인생의 르네쌍스 시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이 그런 시대라면 나는 다시없이
기쁘겠다. 혹시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면서 다시금 나의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나의 간곡한 원이 있고 또 열심히 노력하게 되면 나에게
인생의 역전 곧 "인생의 르네쌍스"가 가능할 것도 같다.

1974 년은 내가 33 세 되던 해이다. 같은 숫자가 반복되면 독어로는 “술의 숫자


(Schnapszahl)”라고 한다. 그래서 그 해 생일날에는 술(schaps)을 한턱 내야한다. AEG 와
Siemens 의 전산실에서 나는 맥주와 Cognac (Napoleon) 등의 비싼 술로 성대히 생일날
잔치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고별의 파티가 되었다. Evers/Kim System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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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가동되자 Siemens 에서는 경사가 났다. 오일쇼크 때에 지멘스에서는 최단
기간에 자유자제의 유동성 기획을 통해 의사결정을 즉각 내릴 수가 있었다. 외국인들을
해고시키는 구조조정에서 나는 특례로 제외시키도록 할테니 AEG 를 사임하고 Siemens
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에 이미 서
베를린 노동사회청 전산실로 직장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1974 년 6 월부터 자리를 옮길 수 있었으나 AEG 와 Siemens 의 전산실에서 업무를


인계하고 말끔히 정리하고 떠나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해 10 월 1 일부터 노동사회청에서
근무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Lichterfelde 로 이사하여 멋진 저택에서 살게되니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다. 다시 가족적인 분위기가 마련되었는데 야리우스여사는 나의 프로
그래밍 능력은 물론 학식과 음악적인 소양을 아주 높이 샀고 서로 존경하고 북돋아주는
관계로 점점 돈독해졌다. 1974 년 성탄절을 앞둔 나의 피아노독주회는 노동사회청
내에서는 물론 서 베를린시 전체에 메아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1975 년 3 월에 나는 독일
루터교회연합회 산하 목회자를 위한 신학교에 등록 하였다. 그것은 목사안수를 받는
과정이었다. 사실 나는 독일어를 완벽히 구사하고자 목사과정을 시작한 것이다. 1975 년
과 1976 년 네 학기 즉 2 년과정을 다 마치고 국가시험에 응했다. 제 1 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1976 년 8 월 22 일은 나의 독일 유학생활이 10 년이 된 때였다. 체류기간
10 년에 직장이 확보되어 있으면 독일국적을 신청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 나의 강점은
정부기관에서 준공무원 대우로 일하고 있었던 점이다. 독일국적을 얻으면 제 2 차 국가
시험에 응시할 수 있고 합격하게 되면 목사안수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포기하고 나는 한국국적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나는 1976 년 가을학기에 서 베를린
자유대학의 철학과에 새로 등록 하였다.

4. 나의 젊은시절 [4]: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1976 년 가을학기에 나는 서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로 학적을 옮겼다. 주로 독일관념론


의 철학을 수강하였다. 이때의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헨릿히(Jürgen Henrich)교수의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관한 명강의를 들은 것이다. 긍정과 부정이 있는데 두번 부정하게
되면 긍정이 된다. 즉 (-1) + (-1) = +2 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생각하기를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그 부정은 가장 큰 긍정"이라는 것이다. “Die sich negierende
Negation heißt die grösste Bejahung”. 그래서 기독교초기에서의 순교정신이 기독교
역사를 최대로 긍정하게 된 것이라는 헨릿히 교수의 해석이었다. 내 마음에 무척 와
닿는 강의였다. "내가 내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긍정이 되겠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때에 깨달았다. 그 강의를 들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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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로는 내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는 가장 큰 긍정이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희망과 함께...

불교이상론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 (Anatman)이다. 즉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상태는 헤겔의 "자기부정"과는 조금 다르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는 경지 일 뿐 자신을 내어던지는 순교의 정신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순결, 순종, 순교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1976 년은 나에게는 큰 것을 깨달았던 때이다. 서 베를린 노동사회청에서 백만인이 넘는
사회복지금 수령자의 정보처리를 전산화 하는 일과 나의 본격적인 철학공부와 피아노
연습하는 일로 나의 하루의 일과는 채워졌다. 그 해에는 나는 주로 서 베를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1976 년이 지나가고 1977 년이 되었다. 나는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베를린 음악대학(지금은 예술대학교)에 부전공자로 등록하였다.
피아노, 작곡, 지휘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 하였다.

작곡과에는 윤이상선생을 가르친 슈바르츠-쉴링 교수가 아직 강의하고 계셨다. 그분의


베토벤 심포니 해석강의를 수강하였다. 1977 년 가을학기의 일이다. 수강하는 학생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찰만(Zahlmann) 이라는 독일학생과 하지매 고노라는 일본
학생과 나였다. 하지매 고노는 피아노과 찰만은 작곡과에 등록한 학생들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발작증세가 재발해 리히터펠데(Lichterfelde)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래서
나는 슈바르츠-쉴링교수에게 강의에 결석한다고 전화를 드렸다. 독일학생도 결석한다고
했고 일본학생 하지매 고노는 무단결석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슈바르츠 쉴링
교수님이 병원으로 찾아오셨다. 놀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교수님께서 학생
모두가 결석하여서 시간이 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병문안으로
생각하였다. 그래도 저명한 교수님께서 나를 찾아 주신 것이 너무나 영광되고 어려워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여러번 내 건강이 괜챦으냐고 물으셨다. 그러시더니 가방에서
베토벤의 영웅심포니 총보를 꺼내서 내게 작곡형식에 관하여 설명해 주셨다. 그
병실에서 나에게 90 분 강의를 하신 것이다. 책임감과 사랑과 헌신이 녹아 든
독일교수님의 참다운 모습을 그때에 나는 체험할 수 있었다. 강의장으로 둔갑한 그
병실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다. 1977 년에 나는 서
베를린의 노동사회청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보장제도의 업무들을 전산화하고 있었다. 그
중에 공무원들의 노후보장문제를 처리하는 시스템이 가장 방대하고 복잡하였다.
세금계산하는 subroutine 을 완전히 FORTRAN 으로 프로그래밍해야 했었다. 완전히
공과대학 전산실의 수준급 프로그래밍이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로 기억된다. 내가
목욕탕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몸은 완전히 벗은 상태였다. 자칫 잘못했으면
목욕탕 안에서 익사할 번 하였다. 야리우스여사가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의사를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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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했기 때문에 다시 의식이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야리우스여사가 전보용지
종이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깨어난 나에게 주면서 급히 한국에 전화를 해 보라는
것이다. 전보의 내용은 영문이었다. "Please wire me. Kyung Bae Min. Yonsei University"
그리고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가 쓰러진 것은 아마도 과로한 탓이었던 것 같다.

나는 우체국에 나가서 한국에다 전화를 했다. 그때에 민경배교수는 연세대학교 교목


실장이었다. 내게 잠시 한국에 방문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교목으로 나를 초빙 하겠다는
것이다. 대우는 전임강사의 마지막 호봉인데 1 년 뒤에는 조교수로 승진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잘 알았다고 하고 야리우스여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독일에서는 교수
(Professor)라고 하면 사회적인 지명도가 매우 높아서 최고의 명예직인데 모국에서
교수로 부른다고 하면 귀국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 베를린 노동
사회청에 그대로 남아서 일하고 싶었다. 분위기도 좋고 나의 실력도 인정을 받았고 내가
하는 일도 내 마음에 들고 또 무엇보다도 사회보장제도를 전산화하는 큰 보람도 있었다.
나는 그 다음주에 휴가를 얻어서 서울로 향했다. 연세대학교에 와서 민경배 목사님을
만났더니 제일 첫번으로 백낙준박사님을 만나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당시 연세
대학교의 명예총장님이셨다. 1974 년도에 나의 통과되지 아니한 박사논문의 요약이
"니체의 허무주의 이해"라고 하여 기독교사상지에 발표가 되었는데 백낙준박사님이
관심을 가지고 나의 논문을 다 읽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신의 죽음과 인간의
축제", "절망에로의 가르침", "나사렛 예수와 새 예루살렘",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사와
현대교회" 등 계속하여 나의 글들이 기독교사상지에 발표가 되었었다. 백낙준박사님께서
나의 발표된 글들을 거의 다 읽으시고 나서 민경배교목실장에게 독일에 있는 김정양
이라는 사람을 연세대학교의 교목으로 불러와야겠다고 제안하셨다는 것이다. 나의
기독교에 대한 사상이 젊은이들에게 매우 고무적이고 훌륭하여서 연세대학교의 기독교
정신 함양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무조건 교섭해 보라는 하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김기석교수님과 백낙준박사님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김기석교수님은 이미


1974 년도에 타계하셨다. 백낙준 명예총장님은 나에게 몇가지를 물으셨다. 목사안수는
받았는가? 박사학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독일어 실력은 어떠한가? 등이었다. 나는 학위
논문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를 말씀을 드리고 독일의 루터교회에서 목사안수과정을 다
마쳤지만 우리나라 국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안수를 받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국내에서 목사안수는 다시 받으면 되겠고 연세대학교에서 우선은 교목으로
일하면서 신학과와 철학과에서 강의를 맡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이렇게 하여서 나는
1978 년도에 연세대학교로 귀국을 하게 된다. 12 년간의 독일유학생할을 청산하고 난
후였다. 그때까지 나는 김수정과는 별거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이혼에 관하여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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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1974 년에서 1977 년까지 3 년간 나는 런던에다 송금을
하지 못하였다. 김수정은 런던에서 자리를 잡아서 경제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면서
내가 서 베를린 시에서 공무원 대우를 받고 일을 하게 된 것을 무척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을 하였다. 나더러 독일국적을 얻으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럽에서 평생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체로 한국여성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유럽에서 여자들을 위해주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더 편안하고 대접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김수정도 그러한 여자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유럽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는 연세대학교로 귀국하겠다고 말하자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12 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그래 고작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귀국하려고 하는가? 인생의 목표가 그 수준밖에 안 되는가? 자기는 지금 세계정상에
도전하는 피아니스트인데 한국에서 교수로 불러준다고 해도 안 가겠다고 하면서 내가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봉직되어 가는 것을 유학생의 실패한 경우라고 실랄히 비판하고
나섰다. 나는 그래도 귀국해야겠다고 주장하면서 그 순간 이혼에 관한 내용을 언급
하였다. 나와 함께 연세대학교로 귀국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혼합시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피아노과 교수직을 내가 알아보아 줄 수가 있다고 제안
했을 때에 나를 비웃었다. 고작해야 연세대학교의 교수자리 하나 맡겠다고 고생스런
유학생활을 했는가? 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계속 가겠다고 하면서 이혼하는
것이 서로간에 불가피하다고 거의 동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이혼문제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진행되게 되었다.

나는 귀국하게 되면 나이가 많으신 어머님을 모셔야 하고 또 가정문제에 대한 의혹이


생겨나게 되면 안되겠다는 판단아래에 지금의 혜성의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나와 가까운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한 두번 김수정에게 피아노렛슨을 받은 것 밖에는
인연이 없었다. 혜성엄마도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나와 함께 귀국하여서 새로
가정을 이루고 연세대학교의 교수부인의 처지로 나를 내조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1978 년에 이혼직후 재혼한 후 1979 년도에 현성이를 낳았고, 1980 년도에는
혜성이를 낳았다. 독일의 유학생활도 깨끗이 청산되었고 또 나의 가정문제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조용히 다 해결되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 남은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연세대학교에서는 내가 독일에서 인정받은 프로
그래머라는 것도 또 피아노 독주회를 할 정도로 피아노를 열심히 친 것도 양자 물리학에
매우 깊은 지식을 가진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저 김정양은 연세 대학교의
교목이라는 것만이 나의 사회적인 얼굴에 지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부임
되어와서 첫번으로 기독교사상지에 발표한 나의 글은 "그리스도인의 노력"이라는 짧은
종교적인 수상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인터넷에 올라와 여러 사람들이 조회하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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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받아 가기도 한다. 나는 그때부터 연세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하면서 또 신학과
철학 분야에서 강의하고 논문도 왕성하게 발표하였다.

1978 년 5 월 즉 봄학기가 시작된 후에 나는 정식으로 귀국하였다. 지금의 혜성엄마를


대동코 서울로 완전 귀국한 것이다. 어머님을 비롯한 누님과 형님네가 나의 귀국을
무척도 반가워 하였다. 또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귀국하게 된 것을 금의환향(金衣還鄕)
이라고 하며 기뻐들 하셨다. 나는 곧바로 김수정과의 이혼수속을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
마치고 가정법원으로부터 이혼확인증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새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나의 은사님이신 김찬국교수님께서 해 주셨다. 이렇게 하여 새 가정이 꾸며지고
나는 못다한 효도로 어머님을 극진히 모시기 시작하였다. 혜성엄마 역시 나보다 더
효성이 지극한 면모로 어머님을 섬겼다. 또 아버님의 묘소에 가서 성묘도 하였다. 나의
마음은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것으로
느껴졌다.

1978 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는 중에 새해인 1979 년을 맞이하였다. 그 당시의


박정희 유신정권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데모는 최고도에 달했다. 나는 오직 학생들의
데모를 만류하고 지도하는 일에만 몰두해야 했다. 교수다운 학구적인 강의나 연구는
그때로서는 불가능한 사회였다. 한번은 내가 학생들의 데모군중들과 함께 교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외쳐대는 모습을 기관원이 사진을 찍었다. 사진만 보면 내가 학생데모를
선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앙정보부(지금은 국정원)의 기관원들 두 명이 와서 나를
연행해 갔다. 밤새도록 문책을 당하고 고문도 받았다. 왜 학생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지도하는가? 왜 데모를 선동하는가? 이런 일방적인 질문만 있었고 나의 항변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용서를 빌었다. 겨우 풀려나서 다시 연세대학교로 돌아왔다.

그해 1979 년 5 월 20 일 독일의 루터교회의 총감독 샤프(Bischof Sharff) 목사님이 내한


하셨다. 강원용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직원들이 불온한 서적 (칼 맑스
의 공산주의 이론)을 읽었다고 하여 국가보안법의 저촉으로 투옥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을 출옥시켜달라는 부탁으로 샤프감독님이 내한하신 것이다.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
앞에서 채플시간에 설교를 하시는 스케쥴이 잡혀 있었고 주일날에는 영락교회에서 설교
하시는 계획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연세대학교에는 독일
에서 유학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모두 다 통역을
못하겠다고 거절하였다. 혹 정치적으로 몰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통역을 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도 또 영락교회에서도 박정희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노라고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을 투옥시킨다고 실랄하게
비난하였다.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통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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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에서는 걱정들이 태산 같았다. 공연히 독일에서 잘 있던 사람이 귀국하여서
고생을 한다고 나를 불쌍히 여기는 이야기들이 난무하였다.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긍정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나는 나의 영달이나 안전은 도외시
하고 샤프감독님을 따라 다니면서 계속해 통역을 하였다. 영락교회에서의 설교문에는
박정희를 케니아의 이디 아민(Idi Amin)과 같은 독재자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는 용감하게 그 내용을 그대로 통역 하였다. 샤프감독님의 노력으로 투옥된 사람들이
전원 다 출옥하게 되었다. 샤프 감독님은 내가 통역을 잘한 결과라고 칭찬하셨다. 그런
일이 있고나니 기관원들의 안목에는 내가 반한인사처럼 투영되었다. 나에 대한 감시가
철저해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다 중앙정보부로 보고가 되곤 하였다.
다음 학기에는 10 월 달에 대학원 학생들의 졸업수학 여행 겸 세미나를 위해 강원도
주문진으로 가는 프로그램에 내가 지도교수로 선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님들은 학생들과 그런 여행하는 것을 모두 겁을 낸다.
데모한 학생들이 모두 다 도망갔는데 학생들을 연행해가야 하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조용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30 명 연행해간 사건이 벌어졌다. 서대문 구치소에 모두 다
수감 되었다. 그때는 추석명절 때였다. 나는 샌드위치와 마실 것을 30 명분을 사 가지고
서대문 구치소로 면회를 가려고 하였다. 주변의 다른 교수들이 만류하였다. 안 그래도
나는 찍혀진 사람인데 그런 고생을 왜 사서 하는가 그냥 모르는 척 하라고 하였다.
그래도 나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 개인 돈으로 사가지고 서대문 구치소에 갔다.
구치소에서는 나를 들여 보내주지를 않았다. 학생들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연세대교목이고 학생지도위원인데 지금 추석때에 감옥에서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학생들을 찾아와 따뜻하게 보살필 의무가 있고 그렇게 하면 그 학생들이 나의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 설득을 시켰다. 겨우 허락을 받았는데 면회시간은 3 분이었다. 내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면회실에 가니 학생들이 대성통곡을 하였다.
사실 너무도 원통한 일이었다. 그 학생들은 데모를 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이제 추석 때에 고생들이 많구나. 여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왔으니
나누어 먹도록 하여라.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라 곧 집에 가게 된다. 3 분 밖에 없으니
나는 목사님이니까 너희들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학생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닦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나는 기도를 통하여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였다. 또 기도를
무려 10 분이나 계속 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나를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에서였다. 마침 옆에서 감독하던 순경이 교회의 집사라고 하면서 나의 기도에 오히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자기가 잘 보살피겠다고 나에게 걱정
말라고 위로까지 해주는 정도였다.

그리고나서 나는 대학원학생들의 수학여행에 나섰다. 주문진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데모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내가 독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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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핏셔(Martin Fisher)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 하였다. 히틀러
는 분명히 멸망하게 되어 있다. 세 가지 중에 한가지만 알고 있어도 망하지 않을 수
있는데 히틀러는 그 세가지를 다 모르기 때문이다. 1) 하나님, 2) 인간, 3) 역사.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알고 있어도 안 망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교회의
십자가를 다 철거하고 자기의 초상화를 걸으라고 명령하였다.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수없이 죽였다. 인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역사를 보면 알텐데 히틀러는 역사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망하게 되어 있었다. 이 말을 되풀이
하면서 박정희는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멸하게 되어 있다. 그 역시 신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고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넘어지는 사람에게 발길질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다 마치고 우리는
10 월 26 일 주문진을 떠났다. 서울에 거의 다 왔을 때에 저녁 늦게 긴급뉴스속보에
박정희가 서거했다는 보도에 접했다. 그 대학원생들이 다음날 모두 다 내 방에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목사님은 큰 예언자이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미리 아시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는 학생들에게 다시 말했다. 공산주의는 망하게 되어 있다. 누가
무너뜨리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논리의 붕괴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의 서거가 누구 때문인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최측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즉 그는 자기모순으로 인하여 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자신도 스스로 모순속에
거하게 되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논리적인 모순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1979 년 10 월 26 일 나의 가르침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1979 년도 12 월 12 일에는 군조직에서 서로간 갈등이 빚어져 내란이 일어날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것이 전두환 장군(육군 소장)의 개입으로 인해 사실상 무마가 되어서
국가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전두환장군은 국가보안최고사령관이 되어서 계엄령하
에서의 국정의 안정을 되찾는 방향으로 인도하였다. 물론 박정희도 군출신이고 전두환
도 군출신으로서 국가를 이끌고 나가는 일에 군조직을 개입시키는 후진국의 양상을 탈피
하지 못하였다. 미국에서는 전두환을 국가지도자로 승인을 하지 않았다. 국민들이 투표
하여 민주적으로 당선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시에 군조직을 동원하여 정권
을 잡은 일종의 후진국의 정권찬탈 내지는 구테타 등으로 인정할 뿐이었다. 그러한
정치적인 분위기는 오랜세월을 독일에서 보낸 나에게는 몹씨도 불안한 정국으로 보였다.
독일 바이로이트의 연출가가 내한하여서 세종문화회관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공연
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긴급한 사태가 벌어지자 독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예술분야
가 그랬다면 금융계에서는 더 심각한 사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국정이 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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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고 언제 어디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이 있을지를 예측할 수 없는 매우 불안한
사회상이 나의 눈 앞에 벌어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야리우스여사가 샤프감독님을 찾아가서 내 걱정을 하고 곧바로 서 베를린의 노동사회청


으로 프로그래머로 복귀시키고자 하니 샤프감독님께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내가 연세
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하고 있고 또 샤프감독님을 통역한 사람인 줄을 잘 알고 있었기
에 그런 용기를 가지고 나를 궁지의 사회로부터 안정된 독일사회로 다시 돌아오게 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나는 야리우스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독일 국적을 포기
하고 우리나라 국적을 가지고 독일에서 살았고 또 지금은 모국에 돌아와 조국의 운명이
위태로운 때에 조국을 떠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그 부정이 최대의 긍정인 것이다"라는 헤겔의 명언을 마음에
담았고 또 실천에 옮기고자 한 사람이다.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다가 도망가는 것이나
어려운 조국을 위해 귀국했다가 도피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만일에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산 사람이라면 지금 나의 인생회고록을 어느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 나는 항상 일에 임하거나 사업에 임하거나 교육에 임하거나
한가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것은 "커다란 긍정을 위하여서는 자기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1980 년 초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상스런 말을 하였다. "한
기독교인 실업인이 600 억을 들여서 산상에 민족대성전을 짖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한번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은 김득신이라는 나보다 6 년 위인 선배님이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나는 별로 관심을 가지고 그런 사람을 만나보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강의 중에
사무원이 급한 전화가 교목실로 왔다고 하면서 전화를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독일
에서 야리우스여사가 전화한 줄로 알았다. 그런데 바로 김득신이라는 사람이 전화한
것이다. 지금 당장에 삼청각 이라는 요정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강의중
이니 못나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강의가 중요한게 아니니 나중에 보강한다고 하고
당장에 달려 오라는 것이다. 나는 항상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떤
경우이든지 내게 요청되는 일을 거절해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를 중단하고 택시를
타고 삼청각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스위스 대사, 독일 대사 그리고 미 8 군 군종감의 세
외국인이 모였고, 그 자리에 한국사업가들 3 명이 모였고 김득신이라는 사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통역이 필요하여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나는 독어와
영어에 능통한 것으로 김득신은 알고 있었다. 그 한국인 사업가중의 한 사람이 명성
그룹의 김철호회장이었다. 나는 스위스대사와 독일대사들과는 독일어로 대화를 하였다.
그런데 미 8 군 군종감도 제 2 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하여 배웠다고 하면서 영어는
사용하지 말고 독일어로만 이야기 하자고 제안 하였다. 그 분도 독일어가 유창하였다.
우리는 갑자기 독일이나 스위스에 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한참동안 정국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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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학생지도위원이니 학생들의 동향과 향후 우리나라
의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인지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어 하였다.
단순한 통역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들 나를 통하여 한국의 정국에 관한 내 의견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독일에서 지난 일 등에
관하여 소상히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로 한반도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발전은 후퇴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고무적인 견해를 피력
하였다. 특히 스위스 대사님은 중립국의 입장에서 자기도 그러리라고 믿고 있다고
말하였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게 되었는데 김철호회장이 나를 자기의 자동차로 연세대학교


에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함께 신촌에 다 왔는데 거기의 좀 조용한 분위기
의 커피숍에서 자기와 잠시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때에 나의 독일어 실력을
칭찬하면서 스위스에 대한 자신의 열망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 하였다. 나는 듣는
입장만 취하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주 자동차를 보내서 나를 자기의 집무실
(대학로의 샘터빌딩)로 불렀다. 김철호 회장과는 이러한 연관으로 인해 만나게 된 것이다.
1980 년에서부터 1983 년까지 3 년 동안 나는 김철호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던 명성그룹
에서 사외이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군인들의 정치하의 교수생활에 혐오
를 느끼고서 연세대학교에 사표를 내고는 명성그룹의 정식 회사원으로 일을 하였다.
우선은 전산실을 세우고 거기에서 관광사업을 위한 전산화를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스위스와 독일과 사업적인 유대를 맺는 국제개발부서를 창설하여 내가 전문이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연세대 교목을 역임하였으니 명성그룹에서 매 월요일 9 시에
간단한 예배를 인도하는 사목의 역할 등 세 가지 분야에서 열심히 일했다. 김철호회장과
함께 나는 스위스에 빈번히 출장을 갔다. 명성콘도는 스위스식의 관광숙박시설이다.
그리고 호텔운영 등도 스위스의 노하우를 직수입 하였다. 국내에서는 명성그룹은 관광
회사로서는 으뜸가는 자리에 있었다. 완전히 전산화된 회사이고 또 스위스와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사업하는 글로벌 회사로 승격되었다. 나의 경제력이 연세대 교수때
보다는 크게 향상 되었다. 그래서 은마아파트를 구입하여서 가정도 안정된 분위기에
살도록 하였다.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 이후로 지금까지 다시 독일로 돌아가 영주 하겠다
는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다. 나의 살 곳은 지금도 한국이다. 그러나 스위스, 독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등지에는 수없이 여행하였다. 명성그룹에 있을 때에 미국과
앨라스카엘 자주 방문 하였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 “남태평양의 꽃” 피지 섬에도
자주 방문하였다. 그만큼 나는 지구촌을 두루 다니면서 나의 견문을 넓일 수가 있었다.
1980 년에 특기해야 할 일은 독일의 자력부상열차를 제작하는 회사 트랜스래피드
(Transrapid)엘 초창기에 방문한 것이다. 그 회사에서는 내가 어떻게 알고 방문하게
되었는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최첨단기술개발이라서 철저한 보안과 비밀유지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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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부상열차가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에 경부선의 고속전철을 독일의
트랜스래피드로 설치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자 김철호
회장과 당시 김기중부회장 두 분을 모시고 독일로 가서 북부독일 라텐 (Lathen)의
트랜스래피드 자력부상열차 시험운행지역엘 방문하였다. 적어도 서울에서 강릉/속초
까지 자력부상열차로 연결할 생각이었다. 시속 500km/h 로서 서울에서 강릉/속초까지 한
시간 이내에 질주할 수가 있었다. 나는 연세대학교의 교목생활은 완전히 청산하고 명성
그룹에서 사업전선들을 오가면서 콘도와 골프장과 위락시설을 건설하는 일에 동분 서주
하였다. 1978 년 5 월에 연세대학교로 귀국한지 3 년만인 1981 년 7 월에 모처럼의
교목직을 나는 사임하였다. 그리고는 명성그룹의 정식 이사로 부임하였다. 미국의 수퍼
컴퓨터회사인 DEC (Digital Equipments Corporation)로부터 최신 모델을 도입하여
전산실을 꾸몄다. 두산그룹, 한국화약, 선경(SK) 등에서 우리의 아담하게 설치된 전산실을
구경하러 오곤 했었다. 나는 그 전산실에서 우선 콘도예약을 전산화 하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명성그룹에서 DM (direct mail) 발송을 시도하였다. 50 만명의 콘도회원에게
홍보문서들을 매달 DM 발송했는데 코오롱그룹에서 자기네들에게도 그 시스템을 개발해
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였다.

그 다음 명성그룹에서 내가 추진한 사업은 지리산케이블카 설치였다. 구례의 화엄사


에서 노고단까지 6.5km 구간을 케이블카로 연결하는 환상적인 프로젝트였다. 삼성과
대우에서도 허가신청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리회사에게로 허가가 났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천재성에 의한 구상과 추진력으로 가능해진 경우였다. 화엄사의 주지승이
자기네들 근교에 케이블카 스테이션을 설치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조용히 법회
하는데 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설득력으로 주지승이 서울로
올라와 명성그룹 회의실에서 김철호회장님과 의논한 후에 허락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곧바로 화엄사의 대지의 사용승낙서를 받았다. 노고단 꼭대기에는 연세대학교를
설립 한 언더우드가 별장을 지어놓은 폐허가 있었다. 약 3000 평 되는 그 장소의 땅을
우리가 매입하였다. 원일한 (언더우드의 손자)박사님을 내가 찾아가 그 땅의 매입을
주선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스틸타워들을 세워야 하는 땅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농업
시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땅도 우리가 매입하고 서울대학교에다가는 다른 땅을
사서 보상 하였다.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에 필요한 땅을 우리가 다 완벽히 매입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업계획서와 기본설계도면을 만들어서 건교부(건설교통부)에
제출하여 우리가 최종허가를 득했다. 김철호회장님은 내가 "일당백에 해당한 명장군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다음단계로 스위스의 유서깊은 케이블카 설치회사인 본롤(Von Roll)
과 기술 협조계약을 맺었다. 착공을 막 시작 하려던 1983 년 8 월 김철호회장이 정치적인
이슈로 인해 구속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지리산 케이블카 사업은 그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때의 허탈감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다. 나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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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든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소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곤 하였다. 하늘이 감동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먼저 감동되곤 하였다. 그리고 일에 임할 때에는 큰 긍정을 얻기
위하여 나는 내 자신을 부정하곤 하였다. 한번도 내 개인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적인 관심사를 물리치지 않으면 절대로 큰 긍정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명성그룹이 완전 하게 제 5 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시절)에 의하여 해체될 줄은
몰랐다. 명성그룹이 당시의 상업은행 (지금 우리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서 콘도와
골프장과 레저타운을 개발하고 청산하지 못한 금액이 1066 억원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환율로서는 정확히 미화 1 억불이었다. 나는 앨라스카의 원주민 상호신용금고로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앨라스카의 원주민들과 우리나라의 조상들과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이야기 하면서 우리 나라의 관광사업에 투자하게 되면 부가가치가 높은 이익이 창출될
것이라고 설득하여서 미화 1 억불의 차관을 확정짖고 돌아왔다. 그런데 귀국하는
과정에서 나는 앵커리지 (앨라스카 수도)에서 뉴욕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나의
형님집을 방문하였다. 거기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뉴욕발 KE001 을 타고 서울
김포공항으로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형님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시기에 앨라스카
원주민들의 자금을 빌려서 명성그룹의 회사부채를 해결하게 되면 김철호회장님을 다시
회사에 복귀시키고 정상화 시킬 수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뉴욕을
떠나서 서울로 향하는 대한항공 KE001 기에 탑승해야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앨라스카의
원주민 상호신용금고 부사장이 조인한 1 억불 차관승낙서를 형님의 책상에 놓아둔 채
공항에 나온 것이다. 형님은 우선 먼저 떠나게 되면 DHL 우편으로 발송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김포공항에 마중나온 회사의 임원들에게 바로 그 문제의 중차대한
차관승낙서를 내어 보여야만 했었다. 빈손을 들고 그들을 만나서는 안되겠기에 다시
형님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비행기 탑승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추격되어서 탑승한 여행객 전원이 몰사한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그런줄도 몰랐다. 두 주일 후에 대한항공에서 실종된 비행기의 진상을 발표할 때에


그 비행기에 내가 탑승했어야 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참으로 이상스런 인생을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보살피고 또 통제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
을 하였다. 나의 국제금융 알선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명성그룹의
문제를 좋은 방향으로 해결코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정이 많이 대립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철호회장의 오만불손한 지경의 교만함으로 그의 사업에 대한 자신감이 오해
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에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전두환과 이순자 두 사람은
명성그룹을 완전히 해체시켜야 되겠다고 할 만큼 감정대립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철호 회장의 사적인 처신의 옳지 못한 점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욕심을 차리는 차원에서 큰 긍정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경우이다. 결국 나의 노력과
눈부신 성공사례에도 불구하고 명성그룹은 공중분해되는 양상으로 돌변하였다.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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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 하였다. 그 과정에 관하여서는 더 이상 내가 서술하기를 원치 않는다. 결국 나는
연세대학교 교목직도 잃고 또 명성그룹의 중역자리도 잃은 실직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후로부터 나는 세기적인 풍운아의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셈이다.
그 해에 영락교회의 당회에서 나에게 부목사로 대우하여 줄 터이니 한경직목사님 기념
사업회의 업무를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영락교회의 몇 몇 장로님
들은 내가 연세대교목이었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잠시 한경직 목사님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생겨났다. 그 당시에 원로목사님으로서 남한산성의 한가한 지역의
독채집에 거하시면서 명상과 집필의 생활을 하고 계셨다. 나는 설교녹음한 것을 카세트
에 옮겨서 판매하는 사업을 하였고,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 기념관의 내부를 과감하게
수리하였다. 그리고 독서실도 따로 꾸며 놓았다. 그러자 한경직목사님은 미국에서
“목사님들의 노벨상” 이라고 알려진 템플턴 (Templeton) 상을 수상 받으시게 되었다.
미국으로부터 저명인사들이 대거 영락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나의 기념관의 대폭적인
수리작업은 마치도 이러한 경사를 예견한 것으로 교인들에게는 알려졌다.

그런데 그해 추수감사절때의 일로 기억된다. 대전에서 한 젊은 목사가 내게 찾아와서


개척교회를 하는데 자금이 모자라니 영락교회에서 좀 지원하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정원영목사(가명)라는 젊은 분이었다. 나는 그 정목사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올라갔다. 한경직목사님께 대전의 개척교회를 위하여서 도움을 청하러 올라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금방 책상 위에서 봉투 하나를 내어 주셨다. 어느 돈이 많은 권사님이
용돈을 쓰라고 어제 주고 갔는데 한경직목사님은 용돈이 필요가 없으니 그냥 가지고
내려가 개척교회운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정목사는 기쁜 마음으로 그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찍 영락교회로 나를 찾아왔다.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봉투를 다시 내어 놓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1 억원 짜리
수표가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삼천만원도 아니고 삼억원이라는 거액을 그대로 받을 수가
없어서 가지고 올라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목사와
함께 그 즉시로 남한산성으로 올라갔다. 한경직목사님께 그 봉투를 다시 드리면서
너무나 금액이 많아서 잘못된 것으로 알고 다시 가지고 왔다고 설명을 드렸다. 그때에
한경직목사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나에게 어느 돈이 많으신 권사님이 사적으로
나의 용돈이라고 하면서 그 봉투를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 얼마가 들었는지 나도
몰랐습니다. 다만 그러한 용돈을 영락교회에다 헌금한 것으로 내어 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가지고 있었는데 참 잘 되었습니다. 나에게 3 억이라는 거금이 용돈으로
쓰여질 번 하였군요. 그런 용돈은 필요치 않으니 그대로 가지고 대전으로 내려가세요.
개척교회의 발전에 사용된다면 내 용돈의 목적보다 더 아름답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락교회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니 이 돈 봉투는 그냥 가지고 대전으로
내려가세요. 내가 개인적으로 그 개척교회에다 헌금한 것으로 하십시다.” 우리는 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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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 대전의 개척교회의 발전을 위하여서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나에게
그날의 한경직목사님는 더 더욱 근엄하시고 경건하신 성자처럼 보였다. 그날 나에게는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전혀 물욕과 권세욕과
명예욕 등이 보여지지 아니한 경우였다.

5. 나의 젊은시절 [5]: 알프스의 자연인

1983 년 내가 42 세 되던 해에 나는 한국 내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매우 외롭고 처참한


처지로 나의 인생의 행로가 전락되고 말았다. 두 세 살난 어린 딸들을 데리고 나는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뉴욕의 형님이 나를 초청하였는데 주변에서 나의 근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온 가족이 미국이나 독일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뉴욕으로 갔다. 거기에서 형님의 사업을 도왔다. 우선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열심히 하였다. 그때에 배워둔 다림질 솜씨는 내 자신을 위하여서는 항상 산뜻한 그리고
단정한 외모를 가꾸는 일에 필요한 훈련이기도 하였다. 6 개월을 형님과 함께 미국의
이민사회에서 장삿꾼 노릇을 하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스위스의 본롤(Von Roll) 회사에서
나를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뉴욕에서 나는 스위스의 취리히로 갔다. 본롤(Von Roll)
회사에서는 도대체 명성그룹과 정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를 소상히 알고자 하였다.
지리산 케이블카 프로젝트가 스위스의 UBS (Union Bank of Switzerland)의 자금지원으로
다 결정이 되어서 착공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무산된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본롤(Von Roll) 본사에 나타나 해명해 주기를 원한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이 벌써 이루어져야 했는데 명성그룹의 해체과정에서 전 직원들에게는
출국정지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아무도 출국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나 혼자만
출국정지 명령이 해소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앨라스카에도 가고 또 뉴욕에 장기간 머물
수도 있었다.

내가 매우 자세하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을 때에 본롤(Von Roll) 사장 파토리니


(Fattorini) 씨와 부사장 브란덴베르거(Brandenberger)씨 그리고 기술자 그륏터 (Gruetter)
씨가 다 잘 이해 하였다고 말했다. "파티를 준비하고 요리를 다 만들었는데 주방에서
사고가 난 경우와 흡사하다"라는 표현으로 나에게 위로를 해 주었다. 그리고는 나의
그간의 노력과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1 년간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에
체류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때에 나는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되었으니 가족은 데리고 올 수가 없다고 말하고 그 대신 그 경비로 내가 혼자서
2 년간 스위스에 머물면서 취리히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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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받아 드려져서 나는 취리히에 2 년간 머물 수 있는 방편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가 형님과 작별하고 나는 다시 스위스 취리히로 갔다.

취리히대학교의 신학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 에벨링(Georg Ebeling) 박사님이


은퇴하시고도 출강하였다. "백과사전으로서의 신학 (Theologie als Enzyklopädie)"이라는
제목의 강의였다. 거기에서 에벨링교수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누가 핵물리학에
관심을 둘 사람이 있는가고 물었다.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과거에 바이츠제커
(Weizsaecker) 교수와 하이젠베르그(Heisenberg) 교수에게서 강의를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곧바로 에벨링교수가 나를 바이츠제커교수에게 보내서 핵물리학을
공부하도록 주선하였다. 바이츠제커교수는 에벨링교수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 한
때에 나와도 만나본 사이라서 그 시간 이후부터 나는 뮌헨의 슈바빙에서 바이츠제커
교수와 함께 핵물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기초과학공부를 다시 하였다. 김나지움에
가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 고등수학 등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위스 에서의 2 년간은 핵물리학 연구만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제네바에는
유럽입자물리학 연구소(CERN) 라는 유명한 학술기관이 있었다. 거기에는 바이츠제커
교수님의 아들이 연구소장으로 부임되어 있었다. 빈번히 나는 CERN 에 들러서
우주입자물리학에 관한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 빅뱅테스트를 하는 LHC
(Large Hadron Collider) 가 설계되고 있었다. 바로 그 초창기에 나는 LHC 에 관한 원리와
특수물리학 그리고 빅뱅테스트의 결과수집 등에 관한 방법론 등에 대하여 연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에서 넬로 산티(Nello Santi) 밑에서 지휘공부를 시작


하였다. 나중에는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서 피터 막 (Peter Maag)에게 본격적인 지휘자
수업에 몰입하게 되었다. 우주입자물리학과 오케스트라 지휘를 동시에 배우는 일 두
가지가 내게 가능하게 되었다. 헤겔의 말대로 나는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두 분야에 나의 젊음의 에너지를 총동원 하였다. 그 결과 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하게 되었다. 내 자신에게도 지휘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
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본롤(Von Roll) 에서 매월 지급해 준 500 스위스 프랑은
2 년 만에 다 끝났고 나는 그 다음부터는 나의 자력으로 공부를 더 계속해야 하는 처지
가 되었다. 사실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잠자리가 없으면 나는 알프스 언덕의 푸른
초장에서 나무뿌리를 벼개삼아 그리고 하늘의 총총 떠오르는 별들을 이불삼아 자연속에
묻혀서 생활하게 되었다. 나의 건강은 이미 자연속에서 다 회복 되었다. 자연은 거대한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속에 사는 들짐승들이 어디 아프다고 하는 것을
보았는가? 혹 병든 짐승들이 신음하다가 죽는 경우가 있겠지만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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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날다가 병들어 떨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자연은 그대로 대규모의 병원이다.
나는 이러한 자연병원에 입원되어서 나의 건강을 거의 다 회복하였다. 편두통도 다
없어진 상쾌한 상태에서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지휘수업을 계속 하였다.

1984 년부터 나는 홀로 스위스 취리히 근교에서 지휘공부와 우주입자물리학 연구에 몰입


해 있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나는 야영텐트를 마련하여 알프스의 산간지역의 푸른
초장에서 홀로 지냈다. 때는 여름철이라서 춥지가 않은 계절이었지만 밤에는 쌀쌀하고
서리가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알프스의 산 높이 때문일 것이다. 한번은 한 밤중에 등이
적셔지고 있음을 느끼고 일어났다. 비가 내려서 천막안으로 물이 들어온 것이다. 나는
다음날 낮시간에 고무 매트리스를 사서는 입김으로 공기를 불어넣어서 그 위에서
침대삼아 잠을 자곤 하였다. 그 뒤로는 비가와도 내 몸은 적셔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침이 되면 호텔의 화장실에서 말끔히 씻고는 오페라하우스로 나가는 것이다. 아무도
나의 그런 야영생활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하다가 피터 막 선생님께 나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지 못해 고생하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랬더니 쌍 모리츠
(St. Moritz)의 폰트레지나(Pontresina)에 자기의 별장이 있다고 그곳에 가서 살면서 별장
을 청소하고 잘 관리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피터 막 선생님의 폰트레지나 별장에서 만
2 년을 기거하면서 심포니와 협주곡의 총보들을 읽고 지휘공부를 하였다. 그러면서 우주
입자물리학의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내가 탐독한 책은 바인베르그(Steven Weinberg) 의
"The First Three Minutes"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빅뱅이후의 3 분 동안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우주입자물리학에 관한 깊은 연구였다. 나는 그 책에서 우주
생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폰트레지나에 올라가면 별들이 바로 내 머리위에 떠
있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바로
그 폰트레지나에 묻혔으면 한다. 죽어있는 내 머리위에는 항상 그 아름다운 별들이 떠
있을게 아니겠는가?

쌍 모리츠로 내려오게 되면 니체가 3 년간 거하면서 연구했던 "Nietzsche Haus"가 있다.


거기에는 지금도 니체의 친필원고들과 사진들이 다 보관되어 있다. 나는 폰트레지나에
있으면서 거의 매일같이 니체하우스엘 방문하여 거기에서 니체를 생각하면서 묵념하곤
하였다. 니체 선생과 아주 가까워진 느낌도 들었다. 또 거기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세간티니(Segantini)의 박물관 겸 전시관도 있다. 국제회의들이 그곳에서 빈번히 개최되곤
한다. 그곳의 경치도 환상적이다. 2001 년 4 월 피터 막(Peter Maag) 선생님은 베로나의
원형극장공연 도중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 이듬해인 2002 년 5 월 30 일 KBS 홀에서
모챠르트 피아노협주곡과 플루트협주곡을 지휘하였다. 나는 사실 피터 막 선생님의
서거한 소식에 접하고는 마음속으로는 그 모챠르티아나(Mozartiana Concert) 를 나의
선생님을 기리는 심정으로 연주하였다. 폰트레지나의 별장은 지금은 "casa maag (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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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고 하여 쌍 모리츠시에서 스위스의 거장 피터 막(Peter Maag) 을 기리기 위해
역사적 유물로 보존하고 있다. 피터 막 선생님의 부인 Marica 는 폰트레지나의 냉장고에
먹을 것을 아주 융성하게 준비해 놓고는 내가 쓸 용돈을 부엌식탁에 놓아두곤 하였다.
르노 자동차는 내 전용으로 내어놓아 언제라도 베른(Bern)에 가서 피터 막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피터 막 선생님의 내게 대한 사랑과 배려였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께나 선생님께나 내가 입은 신세를 갚지 못하였다. 그런 내가 어찌 자식으로
부터 효도를 받을 수 있으며 어떤 제자가 그런 나를 존경하겠는가? 81 세까지 건강
하셔서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베로나 원형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신 인격이
고매하신 분을 모셨음에도 나는 그의 영광과 축복에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한 훌륭하신 분들에게 대한 나의 보답은 내 남은 여생에서 잠시라도 좋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작은 정성이 담긴
삶의 표현이다. 그러나 내가 그분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배려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1984 년 하반기에는 피터 막 선생님의 개인 별장인 폰트레지나의 카사 막(casa


maag)에서 매우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나의 하루하루의 삶을 선생님께서 자상
하게 보살펴 주셨다. 그 해 성탄절이 가까운 때에 피터 막 선생님은 베른 오페라 하우스
에서 성악가들을 다섯명을 데리고 폰트레지나로 올라 오셨다. 소프라노 두 명과 테너,
바리톤, 베이스였다. 성탄절과 년말에 오펜바흐(Jacque Offenbach)의 "호프만의 이야기
(Le Conte d'Hoffmann)"의 공연이 계획되어 있어서 출연할 성악가들을 데리고 오신
것이다. 거기에서 하루밤을 유하면서 공연에 관한 여러가지를 서로 의논코자 하였다.
소프라노 가수 중에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의 전속으로 취직된 헬룬 가르도 (Helrun
Gardow)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6 개월동안 머물면서 넬로
산티에게서 지휘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서로 만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은 내가 서
베를린에서 김수정과 함께 유학할 당시에 베를린 음대에서 성악과에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서로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김수정이 여러번 반주를 해준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서로 그때의 일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학교동창생을 만난 것만큼 기뻐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피터 막 선생님은 옛날 학교친구를 만나게 되어서 좋겠다고
하였다.

피터 막 선생님이 직접 Fire Place 안에서 커다란 차돌맹이들을 꺼내고 계셨다.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거들어 드렸다. 하루 종일 불에 달구어진 차돌맹이 8 개를
꺼내서 나무 받침대에 위에 하나씩 올려 놓았다. 나무 받침대는 새카맣게 끄을려 있었다.
여러번 사용했던 것 같았다. 불에 장시간 달구어진 차돌위에다 고기를 구어 먹는 특이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모님인 Marica 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우리나라의 불고기
처럼 얇게 저며서 접시에 담아 가지고 책상위에 놓으셨다. 그리고는 각종의 소스들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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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어 있었다. 계자소스, 도마도케챕, 마요네즈, 매운소스 등이다. 그리고는 샐러드와
올리브 또 싱싱한 과일들이 식탁에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어떻게 음식먹기를 시작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피터 막 선생님이 제일 먼저 소고기를 차돌위에 올려
놓으셨다. 즉석 불고기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싱싱한 양파와 마늘을 함께 올려 놓으셨다.
고기가 다 익자 여러가지 소스와 함께 드시면서 이것을 일본에서 배워왔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다 선생님을 따라서 그렇게 고기를 차돌 위에서 굽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별미였다. 돼지고기도 그렇게 구으니 맛이 특이하였다. 서로 대화를 해가면서 천천히
식사를 했는데 그 불에 달구어진 차돌맹이들이 전혀 식지를 않는 것이다. 와인이 아주
맛있는 것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저녁식사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호프만의 이야기 공연이 끝나고서도 우리는 또 한번 그런 저녁식사 파티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가르도여사가 내게만 할 비밀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자기는 후두암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수술을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주변에서 수술
을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회복은 되더라도 노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는데 자신은
노래를 못하는 인생은 곧 죽은 인생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고민이 크다고 하였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해결할 방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한방요법이 발달되어서
수술을 하지 않고라도 완전회복이 가능하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가르도씨의 얼굴
에서는 화색이 돌면서 한국에 얼마간 체류하면 되겠냐는 것이었다. 한 두달의 휴가로서
는 안 되는데 적어도 1 년 정도는 체류하면서 한방치료를 장기간 받아야 한다고 설명
하였다. 용감히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에다 사표를 내고 한국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간 저축해 놓은 돈도 있으니 1 년간 체류하는 것은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유명한
성악가이니 한국에서 렛슨을 하게 되면 체류비를 벌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1985 년초에 일단 한국에 귀국하여서 상항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가르도
씨는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일주일 휴가를 얻어서 나와 함께 귀국하였다. 김기중
회장님이 그 당시 독채집을 가지고 계셨기에 이층에 방하나를 내어 주셔서 가르도씨는
그 집에 휴가기간 동안 머물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대구의 경북 대학교의 음악
대학 심송학교수(테너)를 만나서 두 학기동안 초빙교수자리를 주선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경북대학교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성악가이니만큼 흔쾌히 초빙교수로 초청한다고
하였다.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특별 아파트가 준비가 되어 있어서 1985 년 가을학기부터
대구에 머물 수가 있도록 확정이 되었다. 대구에는 한약방과 한방의사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에서 가르도씨는 2 년간 머물면서 후두암을 완전히 치료하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
갔다. 지금도 고령인데도 노래를 부르는 행복한 성악가로 독일에서 잘 살고 계신다. 나는
1985 년말까지 폰트레지나에 거주 하면서 나의 지휘자수업과 우주입자물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내가 가르도여사를 도와서 한국에 초빙교수자리를 얻게 하여 준 것을 피터
막 선생님은 자기에게 베푼 일처럼 생각을 하시면서 고맙다고 여러번 인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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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매한 인격자이신 그 선생님을 나는 가까이에서 모신 적이 있었다. 나는
1986 년도에는 폰트레지나에서 내려와 다시 취리히로 갔다. 거기에 한국에서 사업가
들이 몇명 나를 찾아와서 사업을 위해 좀 도와달라는 청탁이 있었다. 그들이 내 호텔비
를 다 부담해 주기로 하고 또 나에게 예후로 돈을 좀 주기로 하였다. 취리히에는
한국음식점으로 "고려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한국에서 온 사업가들을
자주 만났다. 내가 머문 호텔은 Hotel zum Storchen 이라고 스위스에서는 고급호텔로
인정되는 곳이다. 거기에서 우연히도 나는 미국인을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워싱톤
근교의 프레데리히스부르그(Frederichsburg)에 사는 스미스 (Joseph Smith)라는 사람
이었다. 그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나치전범들을 재판했던 뉘른베르그 법정에서
법관으로 나치독일 장교들을 심문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원래 나치독일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아서 그때의 법정에서의 일을 낱낱이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스미스씨는 미국인이지만 독일어를 독일사람처럼 유창히 하고 어조나 액센트에 전혀
어색한 데가 없어서 처음보는 사람은 그를 독일인으로 생각할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느껴졌다.

스미스씨는 박동선씨와도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나에게 말했다. 박동선을 통하여서


한국사람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내게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고
하였다. 호텔에서 항상 함께 아침식사를 했고 또 저녁에도 별다른 계획이 없어서 서로
만나게 되면 한 책상에 앉아서 저녁식사를 하곤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 극장으로 가서 본격적인 지휘자 수업을 하게 되었다. 피터
막 선생님께서 그곳에 나를 천거해 주신 것이다. 클라겐푸르트에서는 나는 거의 정식
으로 오페라지휘자처럼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거기에서 모챠르트의 오페라 "피가로
의 결혼", "마술피리", "코시 판 투테" 등을 지휘해 볼 수가 있었다. 극장장 보힌츠
(Vochinz)씨는 상임지휘자인 필스비져(Filswieser)씨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공연이
끝나면 우리 세 사람은 항상 함께 저녁식사를 하곤 하였다. 내가 클라겐푸르트에서
모챠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하는 일에 심취하여서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중에 1986 년
10 월이 되었다. 미국의 프레데리히스부르그의 스미스씨에게서 나에게 연락이 왔다.
취리히의 호텔을 통해서 내가 클라겐푸르트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클라겐푸르트의
극장으로 전화를 한 것이다. 스미트씨도 내가 스위스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전화내용은 프레데리히스부르그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를 해 줄 수가 있겠느냐는 문의였다. 나는 흔쾌히 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나는 정식으로 초청을 받아서 워싱턴으로 갔다. 거기에서 지휘한 곡목은
모챠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서곡과 Exsultate Jubilate (소프라노를 위한 모테트)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모챠르트의 파리교향곡 등이었다. 약 2 주일 동안 프레데리히스부르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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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면서 나는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도 지휘자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이 눈앞
에 보이는 듯 하였다.

다시 나는 스위스로 돌아왔다. 성탄절에 한국에 가신 가르도여사가 잠시 취리히에


들렀다. 독일 서 베를린의 언니네 집에 들러서 자신의 병이 한국에서 치료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취리히에 들렀던 것이다. 나를 보고서 너무나
기뻐하였다. 나는 미국에서 공연하고 돌아온 이야기 또 그간 클라겐푸르트 극장에서
모챠르트의 오페라들을 독자적으로 지휘한 일 등등에 관하여 자랑삼아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때에 가르도여사님의 말씀이 한국이 너무나도 좋은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젊은 음악하는 학생들의 열의라든가 또 소질 등에 대하여 놀란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
라고 하시면서 자기는 한국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원해서
대구 경북대학교에 2 년간 초빙교수의 대우를 받으면서 후두암을 완전히 치료하게 된
것이다. 내게서 1985 년과 1986 년은 오로지 지휘자로서 나의 실력을 닦았고 또 지휘자
의 역량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던 때였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지휘자의 캐리어를
본격적으로 지속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돈도 명예도 아니다. 오직 배우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 또 내 인격을 함양하는 것만이 내게서 해야 될 일이고 최선책일
뿐이었다.

1986 년에 나는 오케스트라 심포니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들도 지휘를 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하여 지휘자로서의 캐리어를 가는 일에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피터 막 선생님은
나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에다 보내서 본격적인 지휘자과정을 이수토록
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때에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들이 아프고 가정이 다
거들작이 나도록 비참한 현실에서 나는 내 자신의 인생인 취미생활만 하고 있는가고
항의하는 전화들이 빗발쳤다. 우선 혜성엄마의 전화와 큰형님의 야단치는 어조의 전화도
있었다. 나는 급히 귀국하였다. 그래서 피터 막 선생님께 부다페스트로 가는 것을 보류
해야겠다고 하였다. 거기에서부터 나의 지휘자로서의 캐리어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지금처지가 다 잘된 일이지마는 지휘자로서
제대로 승격할 수 있었던 마지막 도약단계에서 피터 막 선생님에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망을 드리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점이 안타깝게 느껴지곤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유럽에서 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귀국하여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로 나의 인생은 변하고 말았다. 귀국해보니 참으로 비참한 가정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병이 나고 아이엄마는 정신착란 증에 걸릴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죽지 못해 사는 형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곧바로 후배가 운영하는 해승운수(컨테이너를 빌려주는 사업)라는 회사에 고문


자리를 얻어서 월급 200 만원을 받으면서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하여서 1986 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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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1987 년이 되었다. 나의 후배는 내가 과학자이고, 목사이고, 음악가이고, 컴퓨터
대가인줄을 알리가 없었다. 그저 나는 나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단순한 업무인 컨테이너
대여사업을 도와주는 일에 취직이 된 셈이다. 월 고정수입이 생기니 가정이 점차 정상화
되기 시작하였다. 우리집에서는 내 나이에 지휘자가 되겠다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모
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도대체 음악이 좋으면 애호가에 머물일이지 40 이 넘어서
음악을 한다는 것이 정상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정을 다 버려가면서...
나는 이러한 비판의 소리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의 노래가락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의 혈액순환속에 음악이 흐른다고 나는 믿었다. 음악가가 따로 있겠는가?
하루종일 내 몸속에서는 음악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의 심장은 곧 음악의 샘터
였다. 1987 년 3 월에 가르도여사님이 후두암으로부터 완전 회복되어서 유럽으로 돌아
가게 되면서 자기를 잘 돌보아 준 심송학교수와 함께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Duo Recital
을 가졌다. 그 음악회에 내가 나타나자 가르도여사는 놀라면서 유럽에 있을 사람이
어찌된 일이냐고 하였다. 음악회를 마치고 가르도여사는 이탈리아 밀라노로 갔다. 거기에
자기소유의 작은 아파트가 있었다. 그 이후부터 내게는 음악가로의 길은 완전히 닫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김자경교수님이 "김자경오페라단"에서 모챠르트의 코시 판 투테
오페라를 공연코자 하는데 나에게 지휘를 맡끼겠다는 것이다. 내가 클라겐푸르티에서 그
오페라를 지휘했다는 것이 김자경교수님께 알려졌던 모양이다. 내가 없을 때에 김자경
교수님이 전화하셨는데 혜성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김자경교수님이 반갑게 인사하면서
나를 지휘자로 정하고자 한다고 하자 "우리애기아빠는 그딴 일은 못합니다. 지휘하겠다
해도 그만두라 하세요"라고 하였다. 그로인해 김자경 교수님이 대경실색하신 일이 있다.
나는 그 순간 이런 여자와도 결별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때야말로 내게는 새로운
삶의 용기가 필요했었다.

6. 나의 젊은시절 [6]: 독일통일의 현장에서

1988 년도는 우리나라에서 제 24 회 국제올림픽경기가 개최된 해이다. 국가의 큰 경사가


났다. 나는 그 해에 해승운수회사에서 성실히 근무하였다. 나는 가정을 떠난지 5 년 만에
다시 가정으로 돌아왔다. 월급은 한 푼도 나를 위하여서는 쓰여지지 않고 긴축적인
가정생활과 저축하는 일에만 필요하였다. 그 일을 위해 나는 1988 년은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가르도여사가 1989 년 7 월에 독일문화원의 초청으로 내한하였다. 당시
독일문화원 원장 나겔(Hans Nagel)씨는 음악가였다. 그래서 가르도여사와 함께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 음악회에서는 나겔원장이 지휘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에서 문화원의 중요한 회의에 출두해 한국과 독일간의 문화
교류에 관한 새로운 국면의 계획이 수립되기 위해 사업보고 및 구상을 발표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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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으로 나겔씨는 독일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7 월 29 일 계획된 독일문화원
주최 음악회는 취소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에 나는 가르도여사의 주선으로 나겔원장
을 대신해 지휘를 하게 되었다. 원래의 프로그램에는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 모챠르트
의 소프라노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아리아, 후반부에 베토벤의 영웅
심포니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을 남겨두고 내가 지휘할 수 있는 그리고
지휘해 본 레파토리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2 년 반 동안 나는 지휘봉을 손에
잡지 않았다.

그래서 모챠르트의 미트리다테서곡, 모챠르트의 콘서트아리아, 모챠르트의 Exsultate


Jubilate, 모챠르트의 파리교향곡(Paris)으로 바꾸었다. 미국 프리드리히스부르그에서 한번
연주한 곡들이기 때문에 내게는 서곡과 콘서트아리아만 준비하면 지휘하는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곧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오케스트라는 서울 심포니였다. 내 마음은
설레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독일에서 구영갑이가 와서는 리허설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빈 심포니같은 소리가 난다고 내 지휘실력에 탄복하였다. 당시 예술의 전당은
콘서트홀만 완성되어 있었고 오페라하우스는 설계 중이었다. 가르도 여사는 무엇보다도
나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을 무척도 기뻐하였다. 연주당일에 김기중회장님 내외분과
목사님 장로님 등 백석교회에서 많이 오셨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의 지휘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2 년 반 만에 나는 다시
무대에 섰고 연주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가르도여사님이 8 월 5 일 독일로 떠나야 했다. 나는 혜성이를 데리고 수중에 450


마르크를 가지고 가르도 여사와 함께 독일로 떠났다. 서 베를린에는 가르도여사님
언니네가 넓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자기동생의 후두암의 치료를 위해 한국에 2 년간
초빙교수로 체류케 하여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면서 방이 두 개가 있는 아파트를 얻어서
내가 혜성이를 데리고 있게끔 돌보아 주었다. 이렇게하여서 나는 혜성이를 데리고
1989 년말까지 서 베를린에 살았다. 내 몸은 음악을 하는 한 건강하였다. 음악이 없는
인생은 내게는 매마른 앙상한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내게서
음악은 직업의식이나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음악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든가
음악을 하게 되면 어떤 유익이 생겨난다든가 하는 생각을 나는 한번도 해 본 일이 없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듣는이가 없어도 나는 음악을 하고 싶다. 서
베를린에서 혜성이와 함께 나는 자주 음악회에 갔다. 내 몸의 혈관에서는 다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1989 년 11 월 9 일 나는 혜성이와 함께 서 베를린에 있었다. 바로
그날은 베를린 장벽이 헐린 날이다. 1961 년 이후 동서 베를린이 분단되고 담이 쌓였다.
베를린 중앙의 브란덴부르그문이 폐쇄 되었다. 그런데 38 년 만에 브란덴부르그문이
개방되고 담이 헐리기 시작하였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막 헐리기 시작한 담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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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앉아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하였다. 나는 혜성이를 데리고 브란덴부르그
문으로 나갔다. 역사적인 순간을 역사적인 장소에서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그 날밤 수
천명이 브란덴부르그문을 걸어서 동 베를린과 서 베를린을 오갔다. 그런데 서 베를린
에서 동 베를린으로 가려면 검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동 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올 때에는 아무런 통제도 없었다. 그리고 그해 12 월 23 일에는 동 베를린의 샤우슈필
하우스(Schauspielhaus)에서 레오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 심포니 제 9 번을 지휘하였다.
12 월 25 일에는 서 베를린의 필하모니홀에서 같은 연주를 하였다. "환희의 찬사(Ode an
die Freude)"를 "자유의 찬사(Ode an die Freiheit)"라고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 나는
테레비 중계로 보았는데 그 감격스러움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독일통일의 현장에 있었다. 1990 년 나는 혜성이를 데리고 오스트리아 클라겐


푸르트(Klagenfurt) 로 갔다. 거기 오페라하우스에서 다시 지휘를 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극장장 보킨스씨와 상임지휘자 필스비져씨가 옛날이나 다름없이 나를 반겼다.
그런데 내가 지휘자로서 일자리를 얻을 기회는 지나갔다. 1989 년 초에 부지휘자 자리가
났었는데 내 생각을 했었으나 이미 다른 사람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내가 좀 늦게 나타
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를 한 명 소개해 주겠다고 하였다. 내가 소개받은
사람은 카를로 코스(Carlo Kos) 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화가인데 오스트리아의 고성
을 헐값으로 매입하여 수 백만불을 들여서 수리를 해서는 호텔영업을 하는 회사에
팔든가 아니면 세를 주어서 거부가 된 사람이다. 탠챠하 (Tentschach)라는 큰 성에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번스타인이 그 성에 자주 와서 머물기 때문에 스타인 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사다 놓았다. 보킨스극장장의 소개로 나는 혜성이와 함께 텐챠하성(Schloss
Tentschach)의 저녁식사에 초대 되었다.

카를로 코스씨는 화가였다. 스스로 추상화를 많이 그렸다. 나와 대화하는 중에


오스트리아에 오래 체류할 계획이라면 자기가 비어있는 작은 아파트를 내어주겠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그리고 유서깊은 집인데 "금거위의 집(Haus zum Goldenen
Gans)"이라고 불려지는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우리가 3 층 전체를 다 사용 하였다.
3 층에는 천정에 유리창문이 달려있어서 밤에는 달과 별들을 쳐다보면서 잠들 수 가
있다. 내게는 갑자기 스위스의 알프스 야영할 때의 생각이 났다. 1990 년은 혜성이와
함께 클라겐푸르트에서 아주 환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 Intermezzo: 인생에서의 음악의 의미 }

나는 인간에게서 가장 인간다움은 음악을 하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고 본다. 원시인


시대에도 율동에 의한 춤과 노래가 있었다. 추수감사를 위한 농부들의 축제는 옛날부터
음악이 전부였다. 음악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반려자로 성실하게 역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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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타고 내려왔다. 인간은 인간을 배신하고 또 속이고 자기의 유익을 챙기기
위하여서 이용도 한다. 그리고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을 때에는 그 인간을 폐기처분
한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너무나 많이 당했다. 나를 통해서 학자로서 음악가로서 사업가
로서 성공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의 한때에 절실했던 인간 관계를
초개와 같이 버렸다. 나와 음악과의 관계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내게서 아무도 믿을
수가 없고 종교도 헛것이고 재물도 헛것일 때가 있지마는 음악과 나와의 관계는 그렇지
가 않다. 음악예술에 대한 내 마음으로부터의 숭경은 한시도 그칠날이 없다. 오죽하면 내
몸에 음악이 임재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혈액순환과정이 곧 음악의 흐름이라고
하지 않는가?

음악은 나의 영원한 친구이다. 나와는 헤어지지 아니하는 가장 충실한 인생의 반려자


이다. 모챠르트의 음악을 내가 가장 좋아했고 또 지휘도 제일 많이 하였다. 거의
모챠르트의 프로그램으로 나는 연주를 자주 하였다. 그 다음에 내게서 중요한 음악가는
슈베르트이다.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작품을 내가 연구하고 연습하고 언젠가는 연주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의 깊은 음악에 대한 열망과 숭경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음악
예술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슈베르트의 가곡과 피아노곡과 실내악과 심포니를
들으면 된다. 인류역사에서 음악의 화신(化身)의 경우는 모챠르트와 슈베르트의 경우이다.
그네들은 음악의 세계에서 그대로 지구로 내려온 천사들이다. 그들이 기록한 작곡의
악보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베토벤이나 브람스는 인간의 노력으로
높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챠르트와 슈베르트는 음악의 세계에서
우리에게도 하강하여 임재한 경우이다. 한번의 기록으로 그네들의 작곡은 완성이 되었다.
수정한 곳이 전혀 보이지 아니한다. 그들은 마음속에 노래를 담아가지고 세상에 내려
왔다. 그래서 그 멜로디와 화음을 그대로 오선지에 옮겨놓은 것으로 끝났다. 즉 일회적인
기록으로 완성된 작곡들이다.

루빈슈타인이 90 세가 되어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요즘 무슨 곡을 연습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모챠르트와 슈베르트의 피아노곡들이라고 답하였다. 그들의 음악이
절대적이라는 표현이다. 앞으로 수 백년 아니 수 천년이 지나도 모챠르트와 슈베르트의
음악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슈베르트는 31 세에 생을 마쳤고, 모챠르트는 36 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짧은 인생에서 근심과 고생도 우리들 보다 더 많이 하였다.
그들은 모두 "시간의 압축"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100 년을 10 년으로 10 년을
1 년으로 압축시킬 수가 있다. 모챠르트와 슈베르트는 그렇게 시간을 압축시킨 사람
들이다. 그런데 내게 신비스런 것은 그 압축된 시간 속에 그리도 많은 근심과 걱정과
고생들이 농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네들은 천재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모챠르트는 660 여곡을 슈베르트는 가곡만 600 곡이 넘고 작품 전체를 다 헤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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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 개가 넘는다.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음악사 자체가 기적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은 모챠르트와 슈베르트의 작곡들이 남아
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기적중의 기적이 축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평생 음악과
가까워야 한다. 그것은 정언명령 (Kategorisches Imperativ)이다. 누가 학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생각처럼 절대적인 a priori 로서 그들의 음악은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인생회고록은 계속된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intermezzo 를 넣는 것은 나의 맑은
생각을 재확인하기 위함이다.

1991 년 9 월부터 현성이와 혜성이는 바드 슈바르타우의 라이브니츠 김나지움에 다녔다.


모챠르트 김나지움에서는 음악과 미술 등을 주로 공부하였는데 물론 다른 과목들도 공부
하지만 라이브니츠 김나지움에서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나는 그
아이들의 어린시절에 예술적인 분야와 과학적인 분야를 동시에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수학은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가능케 하고 또 두뇌작용을 발육기에는 더 심오하게 계발
시킬 수가 있다. 칸트 헤겔 등이 모두 다 자연과학자들이고 수학자들이고 또 철학자
들이고 그러면서 예술가들이다. 라이브니츠는 더 말할 나위없는 훌륭한 철학자이다. 젊은
시절에서의 수학기에는 자연과학, 수학, 인문과학, 예술 등에 관한 폭넓은 훈련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래서 현성이와 혜성이는 독일에서 음악을 중점으로 가르치는 모챠르트 김나지움과


자연과학을 중점으로 가르치는 라이브니츠 김나지움에 보냈다. 거의 독일어를 마스터
하고 또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에서 귀국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2 - 3 년
동안 공부한 것은 우선은 독일어에 치중하였고 예술이나 과학분야에서 초보입문하는
정도에서 한국으로 귀국하여서 현성이는 고등학교과정을 혜성이는 중학교과정을 국내
에서 마쳤다. 그런데 1992 년도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제부터 소상히 서술하고자 한다.
Bad Schwartau 에서 현성이와 혜성이는 엄마가 직접 독일로 와서 데리고 갔고 나는
베를린으로 향했다. 1992 년 말부터 나는 다시 자유로운 혼자의 몸이 되었다. 사실 두
딸들을 데리고 아버지로서 독일에 머무는 일이 결코 용이치 않았다. 1995 년 8 월 6 일이
되면 히로시마에 원폭이 있은지 50 년이 된다. 나는 그때를 준비하기 위하여서 베를린의
일본영사관에 부탁하여서 1945 년 당시의 히로시마의 지도를 입수하였다. 일본어를 잘
하는 한국사람에게 부탁하여서 거리명이나 동네의 이름들을 낱낱이 표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 당시 독일과 일본의 핵물리학 수준을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혼자 거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에서 가능케 되었다. 베를린의 국립
도서관에 가게 되면 일본어와 우리말로 된 서적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영어로된 히로시마 원폭 당시의 역사적인 문헌 등도 다 찾아낼 수가 있다. 그렇게
하여서 나는 1992 년 말에 기초적인 데이타들을 거의 다 내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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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히로시마여! 안녕!” 이라는 역사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처럼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컴퓨터를 내가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종이에다
볼펜으로 수작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1992 년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서
혜성엄마가 나에게 돈 한푼 내어 놓지 않았다. 그간 내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벌어놓은
돈을 다 썼다. 그래서 내가 혼자 지내면서 나는 집세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교통비도 없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고 먼 거리는 불가불 무임승차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음악활동은 마음속에서 완전히 접었다. 베를린에서 내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지휘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히로시마여! 안녕!
이라는 역사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수집과 자료분석과 나의 상상력 등을 총동원하여서
문학작품의 창작에 몰두했던 것이다. 나는 샤를로텐부르그 (Charlottenburg) 궁의 공원
벤취에 앉아서 하루종일 글을 썼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내가 쓴 원고종이들이
모두 다 젖었다. 글씨들이 번져나갔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새 종이에다 옮겨 적었다.
이러한 나를 아무도 경제적으로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노트북 구형이라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내 하는 일이 수월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에 슈베르트를 생각하였다.
그는 너무나 고생하여서 어머님 묘지에 가서 땅을 치면서 울었다. "어머님! 왜 나를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까? 왜 나를 낳으시는 수고를 하셨습니까? 어머님께도 내게도
부질없는 노력일 뿐입니다." 이렇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어머님이 자기를 낳아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 것인데 원망하고 질책한다고 하는 것은 불효중의 불효가 아니겠는가?
나는 나의 고생을 슈베르트의 고생에다 비교하였다. 나는 그 정도로 심각하거나 낙심
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여유가 많고 근심걱정이 없고 무슨 일이든 감행할 수 있는 용기
를 가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슈베르트에 비하면 천배 만배 행복한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지금 작품도 아닌 것을 가지고 노력하고 집착하는 내 자신이 슈베르트 같은
위대한 작곡가에게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역사소설을 쓰려면
핵과학사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21 세기의 핵시대의 여명"이라는 학구적인
저서를 그때에 동시에 저술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 있게 되면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만큼 내 자신을 위하여서는 할 일들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들을 위하여서 시간이 바빴던 것이다. 그래서 1992 년부터는 나는
철저히 내 자신을 위하여서 시간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아주 극단의 개인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베를린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연구하고 집필하는 일에만 몰두 하였다. 24 시간을 거의 내 표준으로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94 년 6 월에 나의 원고들이 탈고가 되었다. "히로시마여!
안녕!" 과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 이다. 서울의 아세아 출판사에서 1995 년 히로시마
원폭 50 주년에 맞추어서 나의 역사소설인 "히로시마여! 안녕!"을 출간해내겠다고 하였다.
원고를 보내면서 원고료 대신에 현성이의 피아노독주회를 주선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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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성이의 생일날인 8 월 11 일에 서울 페스티벌 홀에서 현성이는 피아노
독주회를 했다.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에서 1 - 16 변주까지 절반만 연주하고, 베토벤
의 비창소나타, 슈베르트의 세 개의 피아노를 위한 곡 (Dreistueck fuer Klavier)를
연주하였다. 현성이는 뷔르츠부르그에서 그 곡들을 렛슨을 받았고 또 Martha Argerich
에게도 한번 가서 실력을 점검 받아보기도 하였다. 소질이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그때에 내가 현성이와 약속했다.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 피아노 독주회를
열어주겠다고.... 그 약속이 나의 아세아 출판사와의 원고계약조건으로 이행된 것이다.
나는 현성이의 피아노독주회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성이는 친구들, 가족들
앞에서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

나는 계속하여서 "21 세기의 핵시대의 여명"을 출간해내기 위하여서 둥지라는 출판사와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출판사가 부채로 인해 부도가 나자 나는 누림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원고를 넘겨 주었다. 1994 년말이 되니 두권의 책들이 인쇄에 들어갔으니
교정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일시 귀국하였다. 철저히 교정을 보았는데도
몇군데 오자들이 있는 중에서 나의 두 권의 책은 출판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혜성이가
자기의 유럽여행기를 책으로 펴내면 좋겠다고 하였다. 혜성이는 열심히 일기를 썼다.
그래서 혜성의 책이 "미완성과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누림출판사에서 출판되어 단행본
으로 나왔다. 누림 출판사에는 편집과 책의 레이아웃을 담당한 미스 S 라고 일하고
있었다. 책을 패내는 일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게 일하는 좋은 성격의 젊은 여직원이었다.
한번은 나의 독일과 스위스에서의 생활에서 혜성이를 돌보는 일에 관하여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열심히 경청을 하였다. 그리고나서는 어제 아버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인하여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도 좋은 아버님이 계셨는데 인생에서
뜻하지 아니하는 순간에 결별을 하게 되었다고 침착히 말하였다. 그런데 미스 S 는
슬퍼하는 기색이나 눈물조차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다음날에 그는 결근을 하였다. 나는
그 미스 S 에게 전화를 하였다. 연결이 되지 아니하였다. 얼마후에 누림출판사로 전화가
왔다. 미스 S 였다. 그는 그때에 강원도 속초의 해변가를 찾아갔다고 말하였다. 나는 어서
서울로 돌아오라고 말 하였다. 아름답고 보람이 있는 인생이 곧 있게 될 터이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말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에 미스 S 는 다시 출근을 하였다. 내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였을 때에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하여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때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가 페르샤의 침공을 받아서 왕족들이 모두 포로로 붓잡혀
갔는데 왕의 사랑하는 딸이 페르샤 군인에게 겁탈을 당하고 살해를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기의 부하 군인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지요. 그러자 그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페르샤 군인은 그 그리스 왕에게 친딸이
살해를 당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부하군인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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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가고 물었다지요. 그 왕은 한참후에 말하였다고 합니다. 내 딸에 대한 슬픔은 눈물을
흘리는 단계를 넘어선 슬픔이었다고 답하였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지나치면 눈물이 나지
않지요. 슬픈 정서가 완전히 경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경질된 정서가 조금 풀리게 되면 그때에 눈물이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스 S!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우리 좋은 출판사업을 하십시다. 그리스어로 지식이라는 단어는
“노애마 (Noema)” 입니다. 우리가 출판사를 새로 등록하여서 노애마라고 하고 좋은
서적들을 많이 출간해내면 얼마나 좋은 일이며 보람된 일이겠습니까?” 나는 미스 S 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혜성이와 함께 유럽에 여행갈 계획을 세웠다. 나는 며칠후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등을 찾아가서 해외생활을 하다가 부녀간에 귀국하여서
함께 저서를 출간해냈다고 설명하면서 출간된 책자들을 내어 놓았다. 1995 년도의
히로시마 원폭과 관련된 "히로시마여 안녕!"과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 그리고 혜성이의
"미완성과 완성"에 관한 내용을 인터뷰한 다음 일제히 신문에 기사화 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네이버에 들어가 "김정양 김혜성"을 검색하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그때의 기사들이 확인될 수 있다.

나의 인생에서 내가 원했던 음악가로의 길이 잘 열리지 않았지만 부녀간에 흔하지 않은


인생체험이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책자로 편찬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도 하였다. 나는 지금 나의 인생회고록을 쓰면서 인생은 결코 자기의 원대로만
되어지는게 아님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든 이루어진 것은 좋은 것이고
보람있는 것이다. 니체는 만년에 즉 정신병이 들기 직전에 이상스런 글을 썼다. "되어진
것은 아무 죄가 없다 (Die Unschuld des Werdens)"라는 소책자이다. 니체의 법철학의
체계가 그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범죄사실이라도 되어진 그 현상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환경과 이유와 동기가 문제인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법의 심판은 항상 되어진 것을 가지고 형량을 정한다. 원인과
동기를 해결치 않는 한 인간세상에서 형량을 가하는 법재판은 끊일 날이 없을 것이다.
범죄의 사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생의 행로에 있어서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되어진 것, 나타난 것 등은 다 잘된 것이다.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내가
가르도여사와 함께 혜성이를 데리고 독일로 간 것은 1989 년에는 다시 음악활동을
재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1994 년까지 그 원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는
핵과학사를 더듬었고, 히로시마의 원폭상황을 치밀하고 소상하게 그린 나의 역사소설이
탄생된 것이다.

나를 항상 비판만 하고 지휘자로서의 역량을 인정하지 않았던 큰형님이 "히로시마여!


안녕!"이라는 나의 책을 탐독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직접 평을 하셨다. 작은 책자
이지만 내용은 대서사시이다. 반핵운동을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그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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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누구나 직감하게 된다고 하셨다. 나의 문학창작에 대한 소질을 인정하신 것이다.
큰형님의 제안은 그때부터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한 심정으로 또 동생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심정으로 제안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음악활동을 계속하고 싶었다. 그때에 귀국한 이후로 나는 다시는 유럽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전화와 서신으로 독일에서의 뒷처리를 해결하고 국내에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그러자 김기중회장님이 나와 함께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셨다. 바로 그때에 8 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김철호회장님은 가석방되어서 출옥하셨다.
명성그룹을 다시 재건하겠다고 하여서 과거의 명성 식구들 여러사람들이 다시 모여
들었다. 나도 그 중에 한명이었으나 나는 다시는 사업하는 현장에는 발을 디뎌놓고
싶지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유인으로 머물고 싶었다. 사실 그 당시 나의 마음속에는
현성과 혜성이 그리고 혜성엄마 등과 나는 결별을 결심하고 있었다. 또다시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서 나의 귀한 인생의 시간을 우왕좌왕 하고 싶지가 않았다. 가정이 나의
인생행로에서 그렇게도 중요한 요소는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1995 년 8 월 6 일 히로시마의 원폭 50 주년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세계로 뉴스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세아출판사에다 이야기 하여 히로시마 시장 앞으로 "히로시마여!
안녕!"이라는 책을 20 권을 보내도록 주선하였다. 히로시 하라다 시장님이 나에게 친히
전화하여 감사하다고 하고는 10 권을 더 부탁하였다.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에 영구
전시할 것이며 히로시마 시립도서관에 여러권 비치토록 하겠다고 하였다. 지금도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에는 유일하게 책으로서는 나의 역사소설인 "히로시마여! 안녕!"
만이 전시되어 있다. 얼마전에 히로시마에 방문갔던 사람이 전시된 내 책을 사진으로
찍어서 메일로 보내왔다. 내게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보다 더 영광된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의 핵과학사 저서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은 국방과학원 외교안보원
등에서 필수적으로 읽는 교과서적인 지침서가 되었다.

여러 방송국에서 내 책의 내용을 가지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문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유행에 따르는 잠시 빤짝 떴다가 잊혀지는 그런
선전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나의 책은 그 분야에 깊이 들어간 학자들이 모두 다
잘 쓴 글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식의 논문형식의 저술은 절대로 잘
씌어진 책이라고 생각되지 아니한다. 누가 그런 지루하고 딱딱한 글을 읽겠는가? 글을
부드럽게 쓰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이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계속하여서 시간이 나는대로 글을 쓰기 시작
하였다. 아마도 음악을 내가 무척도 사랑하지마는 내가 작곡을 남기지 못하는 한 나의
음악에 대한 열망과 음악에 대한 소양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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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활동은 내 당대를 위한 것일 뿐 글을 남겨서 후세에 영향을 주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의 인생의 행로에 궤도수정을 가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많은 글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1995 년 나의 저서로 인하여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약 100 여명이 부암아트 홀에


모였는데 5 층에서는 리셉션이 있어서 그때에 간단한 식사와 함께 참석한 내빈들에게
나의 책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을 한권씩 증정하였다. 신문지상에는 나의 두권의
책으로 인해 내 사진과 이름이 수 차례 거론되었다. 큰형님 집에 누님네를 비롯해 친척
들이 많이 모였다. 모두들 신문에서 부녀간에 함께 책을 펴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는
기사를 보았다면서 긍정적인 반응인데 큰형님이 "기자들에게 돈을 얼마를 썼냐?"고
물으셨다. 나는 처음에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기자들에게 촌지를
얼마나 많이 주었으면 일간신문마다 기사가 나갔냐는 뜻이었다. 기사감이 되기 때문에
다루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는 인상이었다. 나에게는 괜찮았는데 어린 혜성 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비교육적인 질문이었다.

1996 년 초에 김기중회장님이 남원에다 스위스식 약수온천 스파(SPA)를 개발하는 사업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 일로 인해 나는 몇명의 사업가들을 대동코 스위스 취리히엘 갔다.
참 오랫만이었다. 남원의 성춘향과 이목룡도령에 관한 이야기와 이탈리아 베로나의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다고하여 남원시와 베로나시가 서로 자매결언을
맺은 일이 있다. 스위스에서는 체파스(CEPAS)라는 회사가 나서서 남원온천을 스위스
수준으로 개발하고 또 UBS 은행으로부터 중장기 차관도 알선키로 하였다. 이렇게하여
1996 년 한해도 빠르게 지나갔다. 바로 이때에 나는 혜성이와 미스 S 를 데리고 스위스
취리히엘 갔었다. 그곳의 출판사와 교섭을 하여서 노애마 (Noema) 문고를 출간해내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리히에서 제네바로 가서 우리가 장기체류할 집을 구하였다.
미스 S 도 그 집에 잠시 거하고는 귀국하였다. 혜성이는 한국에서 중학교의 과정을
마치게 되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학업을 다시 계속할 결심을 하였다. 제네바에서 나는
과거에 유럽핵물리학연구소 (CERN)에서 강입자충돌기 (LHC – Large Hadron Collider)에
관한 특수물리학과 제작과정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7. 나의 젊은시절 [7]: 인생의 새로운 행로

1996 년은 내 나이 55 세가 된 해이다. 나의 젊은시절의 이야기는 25 세때부터 55 세까지


30 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흔하지 않은 인생기담과 같은 지난날의 나의 회고록이다.
이제부터는 56 세에서부터 18 년간의 이야기를 하겠다. 제목을 "나의 새로운 인생행로"
라고 하여 이야기를 새로 시작한다. 1995 년 책을 출간해내는 문제로 내가 귀국했을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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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이는 세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혜성이는 송파여중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에
혜성이 엄마는 길동사거리의 시장내에서 화장품가게를 운영하여 애들을 데리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 즈음하여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어서 방송마다 신문마다
설명되고 있었다. 국민전체가 새로운 통신망에 접선코자 범국민계몽운동을 방불케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기중회장님을 만나서 명성재건이나 남원온천개발 등에 관한 사업이
있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 어떤 돈을 좀 가진 사람이 과거에 내가 컴퓨터전산처리의
실력을 가진 것을 알고 나를 찾아 왔다. 인터넷과 연관된 사업을 하여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취지로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래서 인터넷카페를 내가 구상해 거기에
투자하기로 하였다. 당시 2 억원만 있으면 오늘날 다음이나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카페를
다자인 할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금방 나에게 투자할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 후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한 두달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나의 제안으로 자기가 혼자서
인터넷카페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오프닝 하는데 와서 보라는 것이다. 2 억원이란 자금이
들지 않았는데 잘 될것 같다면서 내게 고맙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보니 선릉역 근처에다
장소를 얻어서는 인터넷카페라는 간판을 걸고는 커피숍을 열었다. 책상마다 PC 가
한대씩 올려져 있었다. 인터넷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도 고용되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터넷하는 것을 배우는 인터넷 커피숍을 열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의 만남과 대화의 광장인 인터넷 카페를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에 인터넷과 연관된 사업을 시작하면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나


내 인생행로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기중회장님과
함께 남원약수온천개발에 스위스의 노하우와 자본을 투입하는 일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사가 있는 체파스회사를 방문하여 1996 년에 삼성동 한국
감정원의 옆건물에 사무실을 얻고서 체파스코리아(CEPAS KOREA)라는 법인을 설립
하였다. 주업무는 관광레저타운개발회사로서 구체적으로는 남원약수온천개발사업을 진행
하였다. 혜성이는 송파여중을 졸업하였고 현성이는 세종고등학교 3 학년이었다. 내가
김기중회장님과 남원시장 및 남원시의 행정요원들이 함께한 사절단을 인솔코 취리히를
방문갈 때에 사진사로 혜성이가 동행하였다. 혜성이는 사진을 아주 잘 찍는다. 1997 년
1 월 우리 사절단 일행은 취리히 체파스 본사에서 회의를 마치고 융프라우반(Jungfrau
Bahn)을 타고 해발 3600 미터의 정상에까지 올라갔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그 장광은
지금도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인터락켄(Interlaken)으로 내려와서 우리는 제네바로 갔다.
거기에서 스위스관광협회가 주최한 국제회의에 참가하였다.

그 국제회의에서 공교롭게도 주한 오스트리아대사인 메짜이(Horst Mezzei) 박사를


만났다. 체파스의 켁카이스(Keckeis) 사장이 나를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소개하자
메짜이 대사님은 1997 년이 슈베르트 탄생 200 주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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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슈베르트 추모행사를 지원하고 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혜성이를
바이올리니스트로 소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해 4 월 17 일 나는 슈베르트 탄생
200 주년 기념음악회를 국립극장 해오름홀에서 개최하였다. 혜성이가 나의 지휘로
모챠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 1 번을 연주하고 나는 슈베르트의 심포니 "The Great"
전악장을 지휘하였다. 물론 메짜이대사님도 그 공연에 참석하셨다. 오랫만에 나는 다시
무대에서 지휘를 하였다. 그날의 음악회의 포스타와 프로그램을 미스 S 가 정성을 들여서
높은 수준의 디자인으로 인쇄 하였다.

1997 년 9 월로 기억한다. 김영삼 대통령임기의 말기였다. 한-SICA 정상회담과 브라질


아르헨티나와도 정상회담이 계획되어 있어서 김영삼대통령이 중부아메리카와 남미를
순방한 일이 있다. 그때에 경제인들 40 명이 동행하였다. 가는 곳마다 우리나라는 부자
경제대국으로 소개되었고 김영삼대통령은 수천 만불 내지는 수 억불의 경제지원을
약속하여 마치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구세주처럼 인정을 받았다. 수 억불 단위의
경제협력의 약속을 받은 브라질에서는 영국에서 가져온 왕실용 마차를 복제한 것으로
기마병의 호위와 함께 우리나라 대통령을 맞이하는 의전까지 전세계뉴스로 방영되었다.
마치도 앨리자벳여왕이 방문한 것을 방불케 하였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한보,
삼미, 해태, 진로 등의 대그룹들이 연쇄부도처리 되는 국내의 열악한 경제형편에 봉착
하였다. 우리나라가 수출강국이다보니 국가의 신용도가 높아서 단기외채를 수월하게
받을 수가 있었다. 당시의 외채가 600 억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300 억달러였다. 국내
경제력이 열악하다보니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원화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1000 원미만이었던 환율이 1200 원선으로 급격히 치솟았다.
김영삼대통령은 기업인들에게 경쟁력을 10%씩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명령해서 승리
한다면 전쟁에서 패배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웃지못할 일은 기업체마다 일제히 10%
경쟁력강화하기 구호를 내걸었던 일이다. 그런다고 없던 경쟁력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

미국에서 한국경제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고 하여 제일 먼저 단기외채들의 상환을 독촉


했고 더 이상의 외채를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이 그러니 다른나라에서도 그러기 시작
하였다. 화급해진 김영삼대통령은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에게 일본에서 단기외채를
300 억달러를 교섭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를 거절하였다. 중남미에 가서
약속한 것은 결국에는 공수표발급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신문지상에 우리나라 경제가
우려된다는 기사들이 보도되자 이경식부총리는 가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이제 곧 세계에서 11 위의 경제국가가 될 것이며 이미 OECD 회원국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저력은 튼튼하다."

그런데 10 월말경 우리나라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금융기금)에다가


긴급수혈과 같이 절박한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신청한 금액은 300 억달러였다.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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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240 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해 우선 40 억달러를 긴급히 우리나라에 방출해
국가외환부도위기를 일차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1997 년말까지 240 억불을 우리나라는
IMF 로부터 빌렸다. 전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에 집중되었다. 과연 한국이 IMF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태국을 비롯한 IMF 외환위기의 한파는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때에 나는 스위스로부터 관광개발자금으로 2 억불을 한국 산업은행
으로 유치하였다. 체파스코리아의 첫번 사업이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남원약수 온천
개발사업에 우선 4 천만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남원약수온천의 사업가는
장기간 걸리는 사업을 하는 것보다는 눈앞의 일확천금을 노렸다. 스위스에서 자금이
들어온다고 하여 연일 보도되자 땅값이 올랐다. 사업가 임사장은 지주들과 짜고 비밀리
에 땅을 고가에 팔아 넘겼다. 지주들 몇명은 미국으로 가버리기도 하였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니 남원약수온천의 지주들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그들은 그러한 개발사업 을
원치 않았다.

1997 년 12 월에 당시의 이경식 경제부총리는 경질되었다. 그 후임으로 임창열이라는


경제전문가 및 금융전문가가 경제부총리가 되었다. 그는 IMF 의 깡드쉬총재와 구제금융
의 총액을 정했고 또 부분적으로나마 일차 40 억달러의 방출을 현실화한 인재이다.
이렇게 하여서 우리나라의 수치스런 이른바 “IMF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해 12 월
18 일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김영삼대통령의 말기에 발생한 이러한 사태는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신용도를 하강시키고 말았다. 어떻게 한달 전에 우리나라의 국고가 텅비게 될
것을 최고위정자가 알지 못하고 중남미를 순방하면서 거액의 경제지원을 약속할 수가
있었겠는가? 일국의 대통령의 이러한 모습은 정치적으로는 우리나라가 후진국임을 자인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러한 때에 내가 체파스코리아를 통하여 2 억불의 관광
자금투자를 유치한 것은 당시 IMF 에서 빌린 돈의 1% 에 근접하는 금액이었다. 1997 년
대선에서 김대중대통령이 당선되었다. 1998 년 2 월 대통령 취임식이 있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은 IMF 로부터 진 빚을 갚는 일에 전 국민이 결집하여야 한다고 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이전인 1998 년 1 월 15 일에 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장농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금부치들을 꺼내서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에 내어놓는 "금모으기운동" 이
시작되었다. 김대중대통령 자신도 취임식 이전에 자기의 소장한 금궤와 금거북이를
들고나와서 은행에 바쳤다. 결혼예물, 국제경기에서 받은 금메달 등 기념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모두 다 은행으로 나왔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십자가로 된 금목걸이를
내어 놓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분이다. 내가 그 정도를 국가
위기를 막기 위해 바치지 못하겠느냐?"고 하여 교인들의 감동을 샀다. 두 달만에 범국민
금모으기운동은 끝났다. 약 350 만명이 자기의 소중한 금들을 나라에 바쳤는데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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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톤이었다. 현금으로 환산하게 되면 약 20 억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전체의
정신자세가 국가가 부도가 나게되면 자기의 결혼이나 운동경기를 기념하는 패물과
메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전 세계로 그 광경이 뉴스에 나갔다. 정녕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국가위기를 자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애국심이 있구나 하는
매우 긍정적인 인상이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세계도처에 새로 심었다. 김대중대통령은
계속하여 국채를 발행하고 해외투자를 유치시켜서 2001 년 8 월에 195 억달러의 잔금을
상환함으로써 IMF 로부터 빌린 구제금융총액을 모두 다 상환하였다.

정치를 잘못하여서 국가가 부도의 위기를 만나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이


일제히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서 가장 값진 재산을 내어놓아 국가위기를 타결한다는
민족적인 결집과 정신적인 무장은 지구촌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위기를 만든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를 해결하는 용기와 헌신과 협조가 범국민적이라는데
세계인들의 촛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때에 사절단을 이끌고 스위스의
취리히를 방문하였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국책은행인 Zurich Kantonalbank 에서 나에게
한국에서의 IMF 위기극복과 향후의 전망에 대하여 이야기 하라고 하여서 약 15 분간
독일어로 연설한 일이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1998 년 6 월 28 일 취리히의
힐튼호텔의 컨벤션룸에서 "한국의 경제적인 전망과 통일문제"를 가지고 영어로 약
70 분간 강의를 하였다. 200 여명의 경제인들, 정치인들, 금융인들, 사업가들이 모여서 내
강의를 예의주시하면서 들었다. 2005 년도의 다보스 국제경제포럼에서는 나의 강의원고가
스위스의 재경부장관이었던 파스칼 쿠셰팡에 의하여서 대독되기도 하였다.

나의 강의 내용속에 한국에서 어떻게하여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였으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서 남북통일의 전망은 있는가 그리고 전국민의 경제위기극복에 대한
열망과 관심과 극복은 보기드문 국가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거대한 자산이라고 하였다.
1997 년과 1998 년의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항은 나로 하여금 경제인으로 인정을 받게
하였다. 스위스의 UBS 와 Credit Suisse 에서는 나를 자주 초대하여서 경제강의를 하도록
하였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내가 항상 고생하는 속에서도 나의 인생의
행로의 기본 방향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에서 나는 희유의 묘한
인생을 살아 가고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스스로 말하고 싶다. 나의
우주 입자물리학의 경지는 매우 깊고 방대하다. 핵물리학에 있어서도 전문지식을 쌓은
것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나의 음악의 세계는 한때에 피터 막 선생님
에게도 인정을 받아서 나를 부다페스트 리스트음악원에 보내려고 거의 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시대에서 나는 단순한 음악가 또는 단순한 지휘자로서 가야할 내
인생이 아니라고 하여서 다른 여건을 만들어 딴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헤겔은 좋은
말을 남겼다. "세계사는 세계심판이다". 나의 시대적 사명은 일종의 역사의 심판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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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의 음성을 경청하면서 나의 인생의 행로를 걸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형님의 목소리나 아내의 목소리나 자식의 목소리를 따라서 나의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무슨 분야에서든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지금까지 나의 젊은시절의 인생회고록을 살펴보면 누구나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업가로서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1998 년말에 나는 남원
약수온천개발의 사업은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국제적인 신용도에서도 내게는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하여 현실에 충실하기 위하여서 어떤 과업이 내게
주어지든지 긍정적인 자세로 일에 임하였다. 혜성이는 나와 함께 사업의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강연을 직접 들으면서 경의롭게 생각하였다.
우선 나의 어학능력에 놀랐다. 독일어로도 강의하고 영어로도 강의하는 나의 어학수준은
유럽의 모국어능력에 준하고 있었음을 점차로 알게 되었다. 혜성이는 내게서 가장
탐나는 재주가 어학능력이라고 하였다. 나는 취리히에서 생활비가 비싸서 독일의 프라이
부르그로 거처를 옮겼다. 혜성이는 프라이부르그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을 공부 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간 취리히의 음대에서 치만스키(Roman Zimansky) 교수님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바이올린 실력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혜성이는 대학공부를 시켜야
겠는데 고등학교과정을 한국에서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아비투어(Abitur, 우리
나라의 수능시험에 해당)에 합격해야만 대학에 진학할 수가 있었다. 나는 혜성이에게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아비투어 시험준비를 하라고 권유하였다. 1998 년은 나는 혜성이와
함께 스위스와 독일에 거했다. 1999 년에도 나는 독일에 있었는데 학문도, 음악도, 사업도
다 그만두고 오직 나 혼자서 명상하면서 나의 독창적인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일에 몰입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내 스스로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게는 괴테와 쉴러
가 문학작품을 남긴 모범적인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1999 년에는 괴테와 쉴러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작품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의 후배인 이두재라는 사람이 나를 스위스에도 찾아왔었고 또 독일의


프라이부르그 에도 찾아왔다. 나는 사업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우건설에 자기의 자형님(누님의 남편)이 중역간부사원으로 있는데 독자적인 사업을
해보고자 한다고 나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에는 독일에는 대체에너지사업으로 풍력
발전기를 개발하는데 있어서 최첨단의 위치에 있었다. 그 사업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권장해 주었다. 1999 년 10 월경에 이두재는 자기의 자형님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독일의 VENTIS 라는 풍력발전기 제조회사와 공동개발계약을 맺는
일에 앞장서서 도와준 일이 있다. 그로 인하여 나는 이두재와 그의 자형님과는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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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또 자주 만나게 되었다. 1999 년 말에 대우빌딩에 사무실을 내서
나를 정식으로 회사의 고문으로 대우하였다. 나는 그때에 혜성이를 데리고 프리마호텔에
장기체류 하였다. 구원창이라는 젊은 사업가가 이두재와 친구였었다. 프리마호텔로 나를
찾아와서 자기의 사업에 스위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줄 수 없겠는가고 물었다. 강원도
의 영랑호 부근에 레저타운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스위스의 관광자금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미 한국산업은행에 2 억불이 그러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들어와 있었고 또 남원약수온천개발을 위하여서 4 천만불의 사용허가가 난 일이 있음을
알려주면서 김기중회장님과 의논하여서 우선 허락이 난 4 천만불을 강원도 영랑호
레저타운개발에 투자하는 일을 추진해 보라고 제안 하였다. 어느날 프리마호텔로 김기중
회장님이 구원창이와 함께 나를 방문하였다. 이렇게하여 나는 이미 접었던 사업에 대한
미련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99 년 12 월 31 일은 금요일이었다. 다음날은 새 세기(new century)가 시작됨과 동시에


새천년(new millenium)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나는 프리마호텔에서 혜성이와
조용히 명상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김기중회장님이 전화를 하셨다. 구원창과 함께 2000
년 1 월 2 일 강원도 영랑호에 다녀오자는 것이다. 오전에는 교회에 갔다가 오후 2 시에
자동차로 떠나기로 하였다. 나는 그날 밤 11 시가 다 되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혜성이가
걱정을 많이 하였다. 호텔 푸론트에서 전화가 왔다. 누가 나를 찾아와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두재사장이 남긴 메모였다. 1 월 3 일 오전 10 시에 꼭 만나자는 것이다.
이사장은 호텔로 자동차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간 곳이 삼성동 혜성빌딩 15 층이었다.
사무실은 넓고 책상도 많았는데 이두재 혼자뿐이었다. 조금 있으니 한 여인사업가가
사장이라고 하면서 들어왔다. 나는 처음에 크게 성공한 여류사업가로 알았다. 이두재
사장이 나를 소개하면서 스위스로부터 관광개발자금을 유치하시고 유럽에 사회적인
인지도가 높으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 여류사업가는 자기를 이미자라고 소개 하였다.
국민가수 이미자와 동일한 이름이라고 하였다.

이두재사장과 함께 이미자사장을 만난 이후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사업을 안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김기중회장과 구원창에게 스위스의 관광개발자금은 강원도 영랑호
레저타운사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제로 사업의 규모로는 설득력이 없었다.
이두재사장이 내 이야기를 이미자사장께 소상히 알리자 그의 내게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나는 혜성빌딩 사무실에서 스위스에다 전화하였다. 켁카이스(Keckeis)가 전화를 받지않고
슈툴츠(Stulz)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로 그에게 나는 이미자사장과 이두재를 소개하였다.
빠른 시일내에 함께 스위스에 가겠다고 하였다. 이미자사장과 이두재는 나를 깊이 신뢰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매일같이 혜성빌딩으로 출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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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 월중순경으로 기억된다. 이미자사장이 파주에 좋은 땅이 있는데 거기에다 관광
단지를 스위스자금으로 건립하면 어떻겠는가고 내게 의논하였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이미자사장의 자동차로 파주에 갔다. 비가와서 길이 미끄러웠다. 자동차를 묘지 부근에
주차하고 문제의 현장을 답사하고자 산으로 올라갔다. 길을 안내하기 위해 이미자사장이
앞장을 섰다. 산 중턱에 올랐는데 거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땅이라고 설명하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 안전히 붓잡으려다가 낭떨어지 아래로
내가 굴러 떨어졌다. 돌에 내 머리를 부딪혀서 나는 기절하였다. 아무도 없는데서 이미자
사장은 나를 무릎에 안고서 "사람 살려주세요. 도와 주세요"하고 외쳤으나 산울림만
메아리칠 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자사장은 하나님께 기도 했다고
말했다. "살려만 주세요. 깨어나게 도와 주세요. 그럼 이분을 잘 모시 겠습니다." 나를
혼자 놓아두고 자동차 있는데로 가서 차를 가지고 동내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려면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만 같아 그대로 나를 안고 의식이 회복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고 했는데 아마도 한 10 분 아니면 길어야 20 분 정도였을
것이다. 비가 내리면서 내게는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의 부축으로 나는
간신히 자동차 있는데로 다시 올라왔다. 그래서 파주의 병원에 이미자 사장은 나를
입원시키고 제부인 전지표전무를 불러 그 병원에 오게 하였다. 병원에서 내머리를 CT
촬영을 하였다. 전문의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물혹이 발견 되었다고 하였다. 그 물혹이
뇌를 압박하게 되면 두통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 병원에 입원하여 그 다음날
퇴원 하였다. 호텔에서는 혜성이가 혼자서 안절부절 밤잠을 설치 면서 기다렸다고
하였다. 호텔로 돌아왔는데 내머리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넓은 반창고를 부쳤는데
보기가 흉하여서 주홍색 베래모를 사서 썼다.

1 월말경 나와 이미자 사장과 이두재사장은 스위스로 떠났다. 이미 슈툴츠씨에게 우리의


여행일정을 알린바 있었다. 케카이스사장은 파키스탄으로 전근갔고 체파스코리아의
우리의 업무는 슈툴츠 씨가 맡고 있었다. 취리히 공항에서 이미자사장과 이두재사장은
처음으로 슈툴츠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일행은 Hotel zum Storchen 에 투숙하였다.
저녁식사 때에는 슈툴츠씨와 사모님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였다. 나는 우선 남원
약수온천사업은 땅문제로 계속할 수 없이 되었고 그대신 이미자/이두재 두분의 관광
단지개발사업을 스위스에서 좀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다음날 UBS(Union
Bank of Switzerland)에 들어가 Kuoni 씨 와 Iselin 씨를 만나서 의논하자고 하였다. 슈툴츠
씨의 안내로 우리는 다음날 오전에 UBS 에서 회의를 하였다. 그 회의에서 체파스
코리아의 회사명으로는 남원사업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포기각서를 쓰고 변경사유를
써서 제출하고 이미자/이두재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다른 스위스법인과 연계
를 맺어야 한다고 하는 설명을 들었다. 슈툴츠씨는 그때에 Amstein Walthert Consulting
회사와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혜성 빌딩에다가는 AW Consulting 의 간판을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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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다. 물론 사전에 그 이름으로 새로 법인등기를 냈다. 이제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였다. 그때에 이미자 사장과 동생네 들의 아이들이 회사로 찾아와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미자사장과 함께 한국산업은행을 방문하여서 스위스의 관광자금을 사용하는 절차


를 의논하였다. 가장 중요한 관건은 슈툴츠씨의 취리히에서의 역할이었다. 혜성빌딩의
임대료가 월 700 만원이었는데 여러 달 체불되어서 거의 매일같이 관리소장 이 직접
올라와 독촉을 하였다. 속히 수익사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무실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임대료가 비싼 혜성빌딩에서 나와서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서 사무실 겸
주거지로 정하고 생활공간과 사업장을 한 장소로 하게 되었다. 한가지 중요한 이야기 가
빠졌다. 우리는 스위스에서 슈툴츠씨의 별장에 초대되었다. 그 별장은 쌍 모리츠에
있었다. 거기에서 높이 올라가면 폰트레지나(Pontresina)이다. 하루를 거기에 유하면서
나는 이미자사장과 이두재사장을 니체하우스와 세간티니 미술관으로 안내 하였다. 나의
그곳에서의 한때의 생활은 추억의 세계일 뿐이었다.

그런데 파주의 땅을 매입하고자 했으나 조건이 맞지않아 성사가 되지 못했다. 거기에


이미자사장의 자금투자한 것들이 회수되지도 않고 이윤발생도 되지않아 매우 큰 자금
들이 결손처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업은 일정한 추진자금이 없으면 진행이 되지
아니한다. 시급한 것은 기초사업자금이 마련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두재 사장이
자형님과 함께 좀 만나자고 하였다. 대우건설에서 베트남 하노이시에 대단위 아파트를
짖는데 UBS 로부터 투자를 알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나는 대우건설의
실무자들과 함께 취리히로 떠났다. 그래서 1 억불 투자를 성사시켰다. 내게 3%의
컴미션이 약속되어 있었다. 나는 취리히 현장에서 내게 지불되는 줄로 알았다. 다들 서울
로 하노이로 떠났는데 내게는 돈 한푼이 없었다. 나는 프라이부르그의 혜성에게로 갔다.
거기에서 한 두달 소식없이 있다가 이두재사장께 전화를 걸었다. 대우건설이 구조조정
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에 혜성이를 데리고 귀국하여 서교호텔에
투숙하였다.

2002 년도에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행사가 일본과 함께 거행되는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해 5 워말에 나는 월드컵이 시작되는 때에 모챠르티아나 (Mozartiana)
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세계적인 명 플루티스트 이레네
그라펜아우어 (Irene Grafenauer)와 젊은 독일의 피아니스트 스테판 란 (Stephan Rahn)이
연주자로 내한 하였다. 나는 KBS 홀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챠르트의 음악만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에서 지휘를 하였다. 이 음악회의 포스타와 프로그램 역시 미스 S 가 특별
디자인을 하였다.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해외연주가들은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슬픈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피터 막 선생님께서 이탈리아 베로나 원형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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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하시던 도중에 타계하신 것이다. 81 세였다고 한다.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사모님인 마리카여사에게도 조의를 표하는 전화조차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에 스테판 란이 나에게 와서 과거에 내가 피아노를 렛슨을 받았던 헬무트
롤로프교수님도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도 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성공적인
음악회를 위하여서 나의 최선을 다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생각으로 나는
그때의 공연에 임했다. 사실 나는 지휘자로서의 인생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지휘할
기회가 온 것이다. 2002 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수서의 현대벤쳐빌에서 지나갔다.
나는 거기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때의 교재로 토마스 홉스
(Thomas Hobbes)의 레비아탄(Leviathan)을 택했다. 영어공부도 중요했지만 거기에서
이미 16 세기 때에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인간로봇에 관한 암시를 알고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그때에 돈이 여러 곳에서 생기기 시작하여 생활은 풍족 하였다.
2002 년말에 혜성이가 스테반과 함께 귀국하여서 여의도의 호텔에서 국회합창단 송년회
때에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혜성이는 일본 오사카에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하고 귀국
하는 것이라고 나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였다. 그때에는 나는 혜성이가 스테반과
결혼할 것으로 알았다. 미래의 사위가 될 사람에게 나는 혜성에게 하듯 극진히 대했다.
양복도 한벌 맞추어주고 연미복도 최고수준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독일로 보내 주었다.
혜성이와 스테반은 그 당시 서교호텔에 머물렀다. 나는 혜성이와 스테반이 제주도를
여행하고 독일로 돌아가게 하고자 비행기표와 호텔숙박 등을 완벽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혜성이는 마다하고 스테반과 그냥 독일로 돌아갔다. 그 즈음에 현성이가 수서의
현대 벤쳐빌에 자주 놀러왔다. 그리고는 피아노가 두 대나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좀
연습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나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거기서는 밤새도록
피아노를 쳐도 방해된다고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가끔씩 현성이는 밤을 지새워
가면서 피아노를 연습하기도 하였다.

2003 년도가 되었다. 나는 무엇인가 사업을 해서 수익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거했던 7 층의 오피스텔 70 평은 월세가 250 만원이었고 9 층의 생활공간은
아파트형이었기 때문에 월세가 350 만원이었다. 매월 600 만원씩 월세를 내야했고 이미
1 년 이상 거하면서 8 천만 원의 월세를 낸 셈이다. 그러한 년간의 수익이 있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아래서 나는 대만으로 사업차 여행을 갔다. 거기에서 수입/수출의 사업
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대만에는 천재적인 과학자이면서 사업가인 황표(黃彪)
라는 한국사람이 살았다. 높은 온도를 많은 전기를 사용치 않고 가능케 하는 이상스런
발열체를 개발하고 있었다. 난방비가 많이 절약될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입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그분네들을 내가 초대하여 잠실에서 세미나를
하고 투자자를 모집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성공적인 결과는 얻지 못하였다. 또 호주
에서 Archer 라는 분이 한국에 방문왔을 때에 그 분을 만나서 호주와 무슨 사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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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고자 노력하였다. 그 분을 한국에 초대하여서 한국의 시장조사도 시키고 또 호주와
좋은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부천과 소사에는 과거의 신흥종교집단이었던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이 있었다. 그 옆의 광활한 대지에 약 1200 개의 아파트를 짖는 일에 내가
관여하여서 유대인 유리엘 바르(Uriel Barr) 를 불러서 해외자금을 유치할 생각도 해
보았다. 이 모든 노력에는 경비가 들게 되어 있었다. 돈만 사용했을 뿐 수익사업은
하나도 성공된 것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 2003 년 5 월이 되었다. 이라크난민돕기
자선음악회를 6 월 30 일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엄에서 계획하여 국회합창단이
출연토록 이미자 사장과 의논코 있었다. 그때에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하피스트를 초대할
생각이었다. 이미자사장은 자기의 아들을 오케스트라와 협연시켰으면 좋겠다고 하여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 3 번의 1 악장을 연주하게 되었다. 수서에서 나는 두대의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에서 만반의 음악회의 준비를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공연을 위하여서 나는 약 6 천만원을 과감하게 지출하였다.
오케스트라, 대관료, 국제적인 연주료 그리고 국회합창단원들의 단복을 최고급으로
패션디자이너에게 맡겼다. 총경비가 그만큼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나는
2003 년말이 되었을 때에 수익사업은 없고 지출은 많아서 결국에는 수서의
현대벤쳐빌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직면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어느 누가 나에게 거액의 자본금을 대어 주면 그러면 멋진 사업을 해보겠다."
나는 이런 생각은 그 발상이 노숙자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자기의 노력으로 사업을 우선은 작은 규모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가만히 남이 가져다 주는 것만을 기다리고 낮잠만
자고 있는 사람에게 수백억의 자본금이 주어지는 법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004 년부터 새로운 각오로 나의 인생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러한 때에 2004 년 성탄절에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형
쓰나미사건이 일어났다. 스리랑카도 굉장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 되었다. 나는 이듬해
2005 년 4 월 5 일 식목일에 쓰나미재해 난민돕기 자선음악회를 양재동의 한전아트
센터에서 개최하였다. 그때에 나는 현성이를 모챠르트 피아노협주곡 제 27 번의 협연자로
무대에 세웠다. 이것은 14 년전에 독일에서 아버지로서 딸에게 하였던 약속이 이행되는
순간이었다. 현성이는 아버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번 약속 한 것을 계속하여 마음에
두어 언젠가 때가오면 그 약속을 실현하시는 분이라고 감탄 하였다.

8. 나의 노년시절 [1]:

2005 년 나는 64 세가 되었다. 65 세면 교수나 목사는 정년 퇴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석좌교수 또는 원로목사라는 칭호로 사회생활은 계속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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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대로부터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서 64 세가 되었을 때에는 점차로 외모에서부터
내면적인 성품에 이르기까지 추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5 년 4 월 5 일
식목일의 연주에서 나는 모챠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이중협주곡 그리고 모챠르트
의 마지막 피아노협주곡인 제 27 번을 지휘하였다. 플루트와 하프의 연주는 오스트리아
의 빈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연주자들이 내한하여 연주하였다. 또 피아노 협주곡은 나의
첫딸 김현성이가 연주를 하였다. 연세대학교의 은퇴한 교수님들 몇분이 그 음악회에
와서는 아버지와 딸과의 협연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면서 나의 지휘하는 모습이
자신들의 처지에 비하면 매우 부러운 경우라고 하였다. 활발한 몸의 운동도 인상적
이지만 아름다운 음악의 선률과 함께 무대위에서의 모든 동작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회가 끝나고나서 처음보는
한 젊은 사람이 나의 저서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이라는 단행본 을 들고와서는 저자의
사진과 내 얼굴과를 비교하면서 “이 책자의 저자가 맞느냐”고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둥 하면서 의혹이 담긴 인상으로 내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MBC 의 박 PD 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나를 1996 년부터 거의 9 년동안 행방을 찾지
못하여 고민했다고 말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시간을 좀 내어 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른 손님들과의 인사를 다 마치고 그를 지휘자실로 불러 들였다. 그는 MBC 에서


다큐먼터리제작을 하고자 나를 필히 만나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거의 10 여년만에 이렇게
만나뵙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연주당일날 그는 경희대학교의 물리학교수를 찾아가서
나의 저서를 내어 보이면서 혹시 이 저자와 연락이 가능한가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교수님이 “오늘 저녁 양재동의 한전아트센타에 가면 만날 수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는 것이다. 자신도 초청장을 받았는데 교수 회의가 있고 저녁에 회식을 하게 되어
있어서 못 참석하는데 거기에서 음악회 끝나고 지휘자이신 김정양씨를 만나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목사님으로서 핵물리학자로서 그리고 음악가로서…. 도저히 이해
가 되지 아니하는 다양하신 분을 이렇게 만나뵙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서두
를 말하고는 MBC 의 예산을 가지고 일본과 독일을 방문하여서 그 책에 거론된 인물들을
만나보고 또 그 내용을 확인하여 다큐먼터리영화를 제작하고자 한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에게 답하였다. 나의 이름이나 그 책자의 제목 등을 절대로 거론하지
마시고 그 내용을 참고로 하여서 MBC 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으로 다큐먼터리영화를
제작하라고 나의 소견을 말하였다.

사실 나는 방송에 나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 내용에 대한 어떠한 저작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자 얼마로 사례를 하면 모든 것을 말씀하신대로 MBC 에
넘겨 주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박 PD 에게 그러한 흥정에는 관심이 없다고 단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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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사를 표명하고는 그만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으니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2005 년 6 월 12 일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98 회 일본의
원자폭탄개발”이라는 다큐먼터리영화가 MBC 에서 방영되었다. MBC 에서 거의 10 년
동안 나의 행방을 찾는일에는 나의 후배친구 이두재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이두재를 몇 번 만났을 때에 그런 제안을 들었던 일을 기억하였으나 정말
로 방송에 다큐먼터리영화가 제작되어서 방영될 줄은 그때에는 알지 못하였다. 일본이
제 2 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원자폭탄 개발에서 시소게임을 하였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일인데 나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고 또 이두재가 MBC 의
친구에게 사실을 알아보고 일본의 핵개발의 제반 경위를 방송망을 통하여서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인하여서 미국
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은 나라로만 알려졌는데 일본이 스스로 원자폭탄(겐자이
바쿠단)을 개발하여서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내용이었다. 그것이 나의 연구로 인하여서 처음으로 공개되자 많은 물의를 일으킨
가운데에 그 책에 거론된 일본핵물리학자들이 현존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MBC 에서
나를 앞장 세워서 그들을 인터뷰하고자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이두재로부터 소상히
들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연구한 내용을 가지고 저작권행사를 하든가 스스로 방송망에
등장하여서 새로운 뉴스를 전하는 언론인의 입장을 원하지 않았었다. MBC 의
다큐먼터리가 방영된 이후에 박 PD 는 인터넷 사이트에다가 나의 이름과 나의 저서
“21 세기 핵시대의 여명”을 거론하면서 그 다큐먼터리영화의 동기부여에 관한 소상한
배경을 알린바 있다.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 독보적인 위치에서 연구한
내용에 대한 독점의식을 가지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알려지는 것이 타당한 것 뿐이다.
누가 연구하여서 세상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0 년까지 5 년동안에 나는 서울에 있었다. 그런데 2008 년 9 월 10 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입자물리학센터 (CERN)에서는 강입자충돌기 (LHC)의 첫번의 실험가동이
있었다. 나는 이미 1985 년말에 바이츠제커교수의 주선으로 제네바의 핵물리학연구소
(CERN)에서 우주입자물리학에 관하여 연구한 일이 있다. 그때에 빅뱅테스트를 위한
강입자충돌기를 제작하는 설계가 한참 진행중에 있었다. 그때에 나는 LHC 의 설계 및
제작초창기에 관여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2008 년 9 월 10 일에 처음으로 실험가동하게
된 것이다. 스위스의 제네바와 프랑스의 페르네이를 연결하는 27km 의 원둘레를 강입자
들이 빛의 속도로 가속된 이후에 서로 충돌을 시키는 실험이었다. 납으로부터 양성자를
채취하여서는 LHC 에 주입하여서 가속시키는 장치가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그런데
첫실험가동에서 초전도자기력의 경미한 오차로 인하여서 가속된 양성자들의 충돌이
불가능하게 되자 실험가동은 일단 중단되고 재실험가동이 2009 년 11 월 20 일로 연기가
되었다. 이러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가 되자 나는 오래전의 LHC 제작할 때의 형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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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고 또 LHC 의 입자물리학개론을 재정리하는 작업에 몰입하였다.
그리하여 2009 년 3 월 14 일 서울 사이버대학으로부터 LHC 에 관한 입자물리학개론과
“신의 입자”에 관한 설명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약 90 분의 강의한 내용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신의 입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한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의 강의한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데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신의 입자”라는 개념이 그로 인하여서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적인 LHC 의 실험으로 인하여서 “신의 입자”의 정체가 밝혀진 다음에 이를


1964 년도에 가설로 설명하였던 피터 힉스 (Peter Higgs) 박사가 2013 년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받게 된다. 2010 년은 폴란드의 음악가 프레데맄 쇼팽 (Frederic Chopin)
이 탄생한지 200 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그해 2 월 22 일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녹색음악회”라는 제목으로 환경보존을 위한 제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오스트리아 빈 방송교향악단의 클라리넷 수석 연주자 유디트 바이쎈그루버
(Judith Weissengruber)와 함께 모챠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KV622 를 연주하였다.
그리고 2010 년 10 월 28 일에는 성남아트센타에서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 2 번 “찬미의
노래 (Lobgesang)” 전곡을 지휘하였다. 오케스트라서주 신포니아를 연주할 때에는
미국의 나사(NASA)의 협조를 얻어서 허블우주천체 망원경이 포착한 신비스런 우주의
사진들을 상영하였다. 멘델스존 자신은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 신포니아를
제 1 악장 (우주의 태동), 제 2 악장 (태양계의 질서), 제 3 악장 (경건한 장소로서의 지구)를
음악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이 부분은 연주를 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이 아름다운 우주를 상징하는 음악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나는 멘델스존의
찬미의 노래 (Lobgesang)를 완벽히 연주한 셈이다. 공연시간은 75 분이었다. 앞부분의
독일국가와 우리나라 애국가를 연주한 시간을 합하면 85 분이었다. 그 공연은 “독일통일
20 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음악회”였다. 그런데 나는 연주하는 동안에 그 음악은 진혼곡
처럼 느껴졌었다.

멘델스존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기 위하여서 작곡한 것이다. 우선


신포니아에서 우주의 태동, 태양계의 질서, 경건한 장소로서의 지구를 표현한 다음에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합창과 독창과 중창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베토벤의
심포니 제 9 번이나 헨델의 메시아 등과 동등한 지위로 인정되는 대곡이다. 그런데 나는
연주가 끝난 다음에야 알았다. 나에게 음악을 공부하라고 많이 격려해 주시고 또
구체적으로 지도해 주신 조상현교수님께서 2010 년 10 월 28 일 저녁에 운명하셨다.
텔레파시의 영향이었는지 모르는데 나는 그 공연을 동시에 세상을 떠난 높으신 영혼을
찬미하기 위한 진혼곡으로 느끼면서 지휘를 하였다. 따라서 음악의 해석이 경건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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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원, 오케스트라단원 그리고 청중들 모두에게 나의 지휘한 그 음악에 특별한
감흥을 받았다고 하였다. 유튜브에 그때의 공연한 녹화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2010 년 11 월 9 일 나는 국학원의 특별초청으로 “천부경과 우주입자물리학”이라는


제목으로 고대의 우리나라의 민족문헌인 천부경에 서술된 내용을 우주입자물리학으로
풀이하였다. 2010 년도의 나의 학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활동은 나의 노년시절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비로서 이때에 나의 인생의 역전인 “인생의 르네쌍스”
의 분위기를 다소나마 체험하게 되었다. 우주입자물리학과 신의 입자에 대한 규명
그리고 12,000 년전 녹두문자로 기록된 바 있는 우리나라 민족문헌인 천부경을 현대
우주입자물리학의 연구결과와 결부시켜서 해석한 것 등이다. 나의 국학원의 특강은
학계와 종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는 우리나라의 민족문화의 개전의 역사를
재해석하기 위하여서 박제상의 부도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우주천체의
기원이 음악의 파장에 기인하였다는 현대적인 우주입자물리학의 내용이 이미 박제상의
부도지에 율(律)과 여(呂)에서 모든 천체가 생겨났다고 하는 서술을 재해석 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와 역사 그리고 우주입자물리학, 우주천체물리학, 기독교에 대한
연구, 양자 물리학과 양자역학 등에서 나의 연구한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하고 “우주의
신앙”의 체계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다물논고 제 1 편이라는 저작으로
탄생되었다. 그것은 나의 우주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는 계속하여서 다물논고
제 2 편과 제 3 편의 원고를 탈고하였다. 2010 년에서 2013 년까지 나는 우주에 대한
연구와 양자물리학에 대한 연구에 집념하였다. 결국 우주물리학과 양자물리학과 음악의
파장에 관한 연구에서 나는 서로 공통된 점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면서 독일에서 유학
할때에 시작한 나치독일의 역사를 총정리하여서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제 3 제국의
흥망성쇠사”라는 원고를 마무리하였다. 이제 단행본으로 출간해내는 것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2013 년초에서부터 나에게는 고혈압증세로 고생하는 증상이 생겨났다. 고혈압을


다스리는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였다. 그리고는 복통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나는 내 몸의 자정능력에 의존하고자 병원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로 이상스런 증상이 나타났다. 장기간의 변비증상과 구토하는 증세가 가시지를
아니하는 것이었다. 이두재는 변비약을 여러 차례 사가지고 와서는 배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장암의 거의 말기에 이른 때여서 수술을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생명이 연장될 수 없는 지경에 달했음을 알았다. 결국 2013 년 12 월
24 일 나는 일원의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여서 대장암수술을 받게 되었다. 암세포의
부위 전체를 도려내기 위하여서 대장을 25 센티미터를 절단해내고 복부에는 배변을
위한 장루주머니를 부착하게 되었다. 2 – 3 년 후에 대장의 연결복원 수술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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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나는 현재까지 불편하지만 장루주머니를 부착한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관이 건강하기 때문에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의 노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2014 년 1 월 3 일 나는 삼성서울병원에서 퇴원하였다. 바로 그날 새벽 5 시경에 나에게


기이한 환상이 보여졌다. 분명 병실내인데 하얀 옷을 입은 낯선 키가 큰 남자가
나타나서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새 생명을 주었는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으로 보상해야 할 것인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차 물었다. “당신에게 새 생명을 주었는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려고 합니까?” 나는 계속해 답변을 못하고 잠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였다. “생각나는 것이 없겠지요! 나를 위하여서 음악을
하시면 됩니다. 음악이 곧 내게 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바로
그해 2014 년 4 월 20 일은 부활절이었다. 나는 그날에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 2 번
“찬미의 노래 (Lobgesang)”를 연주할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대관과 연주
단체를 교섭하는 일에 나섰다. 그리고 국내에서 독창자들을 교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014 년에 대규모의 공연을 하는 것은 나의 약화된 체력으로서는 거의 불가능 하였다.
나는 장루주머니를 제대로 부착하고 또 교환하는 것을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데 아직
익숙되지 아니하여서 몸을 흔들면서 지휘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음악회의
계획을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그러나 2015 년 3 월 1 일에는 고양 아람누리 하이든홀에서
그리고 3 월 3 일에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 모챠르트, 슈베르트의 곡목으로
심포니음악회에서 지휘를 하였다. 내 마음속에서는 2014 년 1 월 3 일 환상에서 만난 그
낯선 위인에게 음악으로 대접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2016 년에도 멘델스존의
찬미의 노래를 공연하려고 대관 및 오케스트라 교섭을 다 끝내고 포스터와 홍보전단까지
다 디자인 하였으나 그 공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2016 년 4 월 10 일에 내게는 매우 위험스런 증상이 새로 생겨났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사라져 버린채 하루 이상 침대에 누어 있어야 하였던 일이다. 나는 그날 다시
삼성 서울병원에 입원 하였는데 하루가 지나서야 의식이 회복되었다. “기억상실증세”라고
해야 하는 일이 생겨난 것이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였을 때에는 과거의 기억이 매우
섬세해졌다. 과거에 잊혀진 사건들이 낱낱이 다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금
집필을 시작하였다. “잊혀진 20 세기”라는 글이다. 그것은 2016 년부터 2018 년까지
삼부작으로 원고가 탈고된 상태에 있다. 잊혀진 20 세기 제 1 권: 유럽의 비운 (독일과
일본), 잊혀진 20 세기 제 2 권: 한반도의 비운, 잊혀진 20 세기 제 3 권: 명성의 비운.
여기에서 제 3 권 “명성의 비운”은 김철호회장에 관한 이야기로서 그가 생전에 친히 읽고
기뻐하신 글이다. 나의 세계사적 인 견지에서 서술된 “잊혀진 20 세기”의 삼부작은 내
나름대로 역사를 관찰한 역사서 라고 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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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7 년 12 월 31 일 새벽에 다시 그 하얀 옷을 입은 낯선 청년이 환상중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짜증을 내는 어조로 나에게 “왜 음악으로 답하지 아니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세상에 음악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리고 나는 음악전공자도 아닌데
왜 내가 음악을 해야만 하느냐?”고 되물었다. 나 역시 다소 짜증나는 어조로 그에게
반문하였다. 그때에 그는 침착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글쎄, 지구촌에는 차고 넘치는
정도로 음악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요. 한마디로 지구는 음악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듣기 좋은 음악이 별로 없어요. 당신의 음악이 듣기가 좋아서 부탁한 것입니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세요. 그럼 당신의 생명은 계속 연장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
청년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참동안 상념에 잠겼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 이 무슨
내용일 것인가? 내가 정녕 음악을 올바로 해석하는 사람인가? 내가 연주하면 천상에까지
듣기 좋은 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것인가? 나는 다시금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 앞에서 지휘하는 일도 해야 하겠지만 내가 독자적으로 음악을
해석하는 길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녕 듣기 좋은 음악을 내가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 혼자서 노력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다시금 피아노음악에 대하여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피아노독주회를 통하여서 내가 천상에 감명을 올려 바치는 계기를 마련하려는 결심이
지금은 돈독해졌다.

사실 나는 평생 피아노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어린 시절 6.25 사변 때에


나는 열살이었다. 서울사범대학의 교수관사에서 살 때였다. 그때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사범대학의 강당엘 들어가 보곤 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제 그랜드 피아노 (Cincinati)가 한대 놓여 있었다. 그 피아노를 만져보고 또 건반을
두드려 보는 것이 내게는 참 좋았다. 그런데 겨울 어느날 강당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나는 창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여다 보았다. 인민군 세명이 도끼를 들고서 그
피아노의 다리를 쳐 부수는 것을 보았다. 창문틈을 통하여 피아노의 현이 울리는 소리가
나에게 들렸다. 나는 그때에 피아노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꼈다. 그 피아노의 소리는
몸에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저 아름다운 피아노가 자기의 음악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금 신음소리를 내고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인민군들은
피아노의 나무조각들을 난로에 넣어서 불을 때고 있었다. 강당이 추우니 피아노를
쳐부셔서 난방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무지몽매한 문외한들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생각과 함께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크나 큰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10 세때의 그 쇼크로 인하여서 나는 평생에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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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에게는 체력이 남아있다. 그리고 나의 두뇌 역시 제대로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피아노음악에 열중하려고 한다. 지금 나의 마음바탕은 예술혼에 대한
숭경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되찾은 것이다. 오호라! 여기가 “인생의 르네쌍스의 한
복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 스쳤다. 나는 갑자기 인생의 희열을 몸 전체로
느끼게 되었다. 지금 내 몸은 떨리고 있다. 내 몸의 전율은 “환희”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 나의 나이는 77 세이다. 또다시 독일어로는 “술의 숫자 (Schnapszahl)”가 된 것이다.
금년의 내 생일날에는 술을 한턱 내는 대신에 음악의 파장을 술잔에 듬뿍 부어서 나의
주변에 뿌려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금 나는 음악에로 정진해야 한다. 이번에는
피아노 음악에 내 모든 생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깨어나자!
일어나자! 할일이 많이 있지 아니하냐? 무엇이든 집착하게 되면 시간은 충분한 것이다.
그 이름 모르는 청년의 말대로 음악에 집착하는 한 나의 생명은 연장될 것으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9. 나의 노년시절 [2]: 추억의 본향을 배회하면서

인간의 두뇌 속에는 바다생물인 해마의 형체를 닮은 기억장치가 한 쌍 존재해 있다고 한


다. 이는 흔히 생체메모리칩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의 기억이 담겨있는
장소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해마는 인생의 모든 “추억의 본향”인 것이다. 그런데
2016년 4월 10일 나에게는 바로 이 생체메모리칩에 이상이 생겼던 것이다. 다시 의식이
회복되어서 해마메모리 생체칩이 정상으로 작동하게 되자 지난날의 모든 사건들이 매우
섬세하게 기억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추억의 본향에 다시 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동안 나는 이 추억의 본향을 배회하였다. 우선 대학교 4학년 때에 밤을 지새워 가면서
공부하던 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되 살아났다. 1963년 5월 어느 한가한 주말에 나는 낮잠
을 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에 소스라치게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바로 내 눈앞에 아
주 가까운 거리에 어머님의 얼굴이 크게 보여진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어머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고 놀라는 표정으로 어머님께 물었다. “아니다. 네가
진정 내 아들인가 의심이 들어서이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에 더 더욱 놀랐다. 그럼 내가
어머님의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다시 들어 누었다. 잠시 경질된 몸의 상태로 어머
님께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어머님이 저를 낳아 주신게 아닌가요? 지금 24세
인데 그 동안에 한번도 그런 말씀이 없으셨는데요.” 어머님은 한 숨을 깊이 쉬시면서 말
씀을 이으셨다. “너는 모르지…. 밤마다 네가 자는 얼굴을 지금처럼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
곤 하였다. 왜냐하면 너는 다섯살 때에 죽어서 내가 매장한 일이 생생하게 기억되기 때
문이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서 내 아들이라고 하니 그간 20여년 동안에 나는 많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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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너를 키웠다. 나의 진짜 아들은 다섯살 때에 죽었고 누가 다른 아이를 내게 데려다
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그칠 수가 없었단다.” 나는 이러한 말씀을 듣고 다시
신중한 자세로 일어나 앉았다.

나는 6.25 동란 때에 누님과 형님들로부터 다섯살 때에 죽어서 매장되었다가 되살아났다


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님께서 그 일을 입에 담지는 않으셨다. 나
는 어머님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듯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 그 때의 일을 좀 자세히 말
씀해 주세요. 누님과 형님에게서는 들은 기억이 나는데 한번도 어머님께서는 그런 말씀
을 안 해 주셨습니다.” 긴 한숨을 내어 쉬시고는 어머님께서 차분한 어조로 말씀을 시작
하셨다. “그러니까 1940년이었던가 보다. 네가 태어난 해인데 음력으로는 부처님이 오신
사월 초파일이었다. 그날에 네가 태어났는데 이듬해 출생신고할 때에 1941년 5월 14일
이라고 하였다. 1940년 그 해에 너의 큰 형님 인양이가 살아 있었다. 12세였지. 매일같이
만삭된 내 배를 쓰다듬으면서 너의 이름을 불렀지. 너의 이름을 김조양 (金朝陽)이라 지
었다. ‘아침햇살’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그 형님이 급성 지프테리아로 돌아가셨어. 그리고
나서 네가 부처님 오신날에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 나는 다 키웠던 큰 아들을 잃고 갓
난아이를 얻은 것이었다. 내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알겠느냐? 그런데 네가 점점 커가면서
얼굴모습 뿐만 아니라 성품과 몸짓이 인양형님을 꼭 빼어 닮았었다. 나는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네가 다섯살 나던 해에 갑자기 구토설사를 하는 증
세로 인하여서 간질병 환자처럼 실신해 바닥에 쓸어진 일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두
번째로 아들을 잃을까 염려되어서 너를 등에 업고 두 재(언덕)를 넘어 뛰어서 선교사 서
양의사에게로 갔었지. 그런데 네 몸은 힘이 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미국선교사
의사님이 청진기로 진찰을 하고나서는 이미 호흡이 멎었다고 하시면서 그냥 집으로 데리
고 가서 장사 지내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는 묵묵히 내 얼굴만 쳐다보고 계
셨다. 내가 긴장된 모습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시고 어머님은 말씀을 이으
셨다. 등에다 숨진 아들을 업고서 그날 집에 돌아와 그냥 죽은 아이를 담요에 말아서는
관을 짤 생각도 없이 표적을 위하여서 어느 고목나무 밑에다 묻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남은 자식들에게 저녁을 먹였다는 것이다. 누님과 형님들이 함께 슬퍼하였다고 말씀 하
셨다. 그런데 새벽에 비가 오고 천둥이 칠 무렵에 내가 의식을 회복했던 모양이다. 옆집
할머니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면서 땅바닥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파내어서
우리 집으로 아침 일찍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 할머님은 나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어
머님께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그러자 어머님께서는 “그래서인지 너는 자라나면서
몸이 매우 허약하였다.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걸음걸이도 제대로 못 걷고
마치도 뇌성마비라도 걸린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건강한 정상적인 어른
이 되지 아니하였냐? 네가 잠들어 있을 때에는 가까이에서 너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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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습관처럼 되었다. 너는 인식을 못했을 따름이야. 아마도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미 다섯살 때에 부활하였으니….. 인간이 죽지 않을 수가 있겠냐? 허나 너는 오래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형편이 생기든지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든지 너는 살
아남게 될 거야. 지금 난리통에도 살아남았지 않으냐? 이제부터는 열심히 공부하고 너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보답이고 또 부처님 오신날에 태어
난 네가 부처님께도 지켜야 할 도리인 것 같다.”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
여 어머님으로부터 소상히 들었다.

그런데 군복무하다가 또 비슷한 일이 생겨났다. 야간기동훈련중에 자동차가 전복되어서


아래의 길로 추락하였는데 나는 뇌진탕으로 인하여 30여 시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
다. 그 이후에 계속하여 발작증세가 일어나곤 하였는데 흡사 간질병환자와 같았다. 어머
님께서는 나의 다섯 살 때의 일을 되새기면서 또 다시 24세가 된 장성한 아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수도육군병원엘 자주 방문하곤 하셨다. 나는 그 당시에 수도육
군병원에 입원하여서 6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내 옆에는 한상열 소령이 함께 누어 있었
다. 그는 취장암에 걸려서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회생의 소망은 없었다. 내가 신학을 공
부하였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한소령은 성경에 관한 내용에 대하여 여러가지 질문을 하
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는데 그
것이 죄가 되는가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나의 생각을 소신껏 말하곤 하였는데 한소령
은 점차로 나를 젊은 목사님처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병원에서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들을 가지고 잘 엮어서 십자가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있었다. 한소령은 자기에게도
그러한 십자가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여서 내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내가 퇴원하
기 일주일 전에 한소령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부인은 나를 목사님처럼 존경
하였다고 하면서 병실에서 간단한 장례식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내 엮은 십
자가 목걸이를 한소령의 가슴위에다 올려 놓았다.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이 나의 장례기도
가 끝나자 한소령의 침대를 시체실로 운반하고 군묘지에 안치시킨다고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수도육군병원에서 퇴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한소령의 부인이 일부러 수도육군의 병실에 찾아와서 나에게 한소령이 소지하였던 수첩
을 주었다. 거기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나에 관한 글들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김정양소위님께”로 시작된 나에게 바친다는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나는 어린
시절에 열심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나에게 큰 재산을 주셔서
부자가 되게 해 주십시요. 나를 출세시켜서 큰 명예를 가지고 살게 해 주십시요. 나에게
건강을 허락하사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살게 해 주십시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
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돈이 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아주 무
명하여서 명예는 얻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건강마저 허락해 주시지 않아서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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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이제 아직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은연
중에 나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내가 부자가 되었다면 얼
마나 나쁜 악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돈이 많으니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었
을 겁니다. 또 내가 큰 명예를 얻었다고 하십시다.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더 나쁜 짓을
하였겠습니까? 건강을 주시지 않았기에 나는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여서 김소위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큰 진리를 깨달은 것은 바로 옆에 함께 누어서 대화하는 중에 김
소위로부터 배운 것이 그 원인이 된 것입니다. 나의 젊은 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았지만 은연중 나는 축복을 받은 생을 영위하다가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소위와 같은 올바른 목사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돈이나 명예를 구하지 말고 또
건강마저도 하나님께 맡기시고 축복의 참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소령의
수첩을 부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다음날에 수도육군병원으로부터 퇴원하였다. 다시 건강
을 회복하고 화천의 제15사단의 최전방 GP부대로 원대복귀 하였다가 원주의 하사관학교
에서 교관근무를 하고는 나의 병역의무를 무사히 마쳤다.

1965년말로 기억된다. 대학원의 입학준비로 인하여서 밤새도록 공부하다가 배가 고파서


국수를 끓여 먹으려고 하였다. 부엌으로 내려가서 연탄난로를 끄집어 내어 그 위에 물을
끓이는 냄비를 올려놓고 방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 몰랐
는데 무슨 타는 냄새가 나기에 그제서야 부엌에 연탄난로 위에 올려 놓은 물 끓이는 냄
비가 생각났다. 부엌에 나가보니 물은 다 졸아 없어지고 바닥이 뻘겋게 달아오른 냄비만
보였다. 나는 얼른 냄비를 쳐들어서 나무조리대 위에 올려 놓고는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국수 먹을 생각이 완전히 없어졌다. 공부하다 말고 들어 누었다가 그만 잠이 들었던 모
양이다. 부엌에서 어머님이 나를 부르시는 소리에 깨어났다. 어머님께서 대노하셨다. “이
게 뭐냐? 나의 부엌의 조리대가 다 타 버렸는데 이거 누가 한 짓이냐? 네가 그런거 아니
냐? 부엌은 나의 매일 일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여기에다 이 따위 흠집을 낸 것이 잘된
일이냐?” 나는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없었다. “용서하세요. 밤중에 좀 출출해서 국수를 삶
아 먹으려다가 그만 깜빡했어요. 용서하세요. 제가 조리대를 새것으로 바꾸어 드릴께요.”
나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됐다 그만하자. 조리대를 새로 바꿀거야 없지. 지금 네가 배
가 고프겠구나.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가 밀가루 국수를 가지고 네가 좋아하는 잔치국수
를 만들어 줄께. 들어가서 너는 공부나 계속하여라!”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신 어머님의 그 인자하신 얼굴 모습이 다시 내게 돋보였다. 그리고는 그날 아침에
어머님이 해 주신 잔치국수에다 양념간장과 고춧가루를 넣어서 잘 먹고 나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이듬해 1966년 8월 22일 나는 김수정을 데리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서 베를린 베다니병원 간호사 기숙사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였을 때였다. 어머님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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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잘 못 쓰시기 때문에 늘 아버님의 편지의 말미에 몇마디 대필하는 형식으로 아버님이
어머님의 말씀을 편지에 쓰시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님의 친필 편지가 왔다. 내용
은 매우 간단한 몇 마디의 문장이었다. “나를 용서해다오. 내 생각이 부족하여서 너를 야
단을 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네가 나의 부엌 조리대 위에다 달아오른 냄비를 올려놓아
검은 둥근 자국을 낸 것을 가지고 얼마나 야단을 쳤던지….. 그게 잘못되어서 너에게 용
서를 빈다. 아침마다 네 생각이 나면 그 둥근 검은 냄비자국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너를
위하여서 기도한단다. 그것이 너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구나! 좋은 흔적을 남겨준
것이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지금서야 깨달았다. 부족한 어머니라서 네가 그런 흔적을
남겨주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어떻게 너를 기억하고 너를 위하여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
겠느냐? 참으로 고맙고 잘 한 일인데 내가 알지 못하여서 너를 심히 꾸짖었었다. 다시
한번 부탁한다. 용서해다오.” 나는 그 어머님의 친필편지를 다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어머님은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나는 그저 “남몰래 흘리는 눈물”만
으로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독일유학중에 나는 전산전문요원으로 시멘스와 아에게-텔레풍켄 회사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다소 풍요로워져서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구입하여서 서 베를린으
로부터 함부르그, 프랑크푸르트, 뭰헨 등지를 다니면서 당대에 유명하였던 교수님들의 강
의를 청강하곤 하였다. 무엇보다도 나치독일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서 당시에 살아
있었던 나치독일의 고위직원이었던 사람들을 방문하여서 인터뷰를 하는 일에도 자동차가
필요하였다. 김수정은 나의 이러한 독일유학생활에 대하여 불평하곤 하였다. 그런데 프랑
크푸르트에서 파더보른 (Paderborn) 의 베벨스부르그 (Wewelsburg)를 방문하려는 도중에
깊은 계곡 위에 설치된 교량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측면바람의 압력을 받아서 교량에서
난간을 들이 받고 아래로 떨어질뻔한 사고를 겪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난간
은 파손이 되었는데 바로 옆에 나무가 자라서 올라와 있었다. 나의 자동차가 그 나무를
함께 들이 받아서 부러지면서 아래의 나무기둥이 내 차의 앞부분을 바치고 있는 절묘한
일이 발생하였다. 나는 그 순간에는 그런 줄을 몰랐다. 그냥 교량아래를 내려다 보았더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 아찔하였다. 자동차 문을 열면 그대로 교량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경찰차가 와서는 긴 장대를 가지고 나를 차에서
구해주었다. “당신의 나라에서는 주차를 이런 식으로 하는가”고 농담이 섞인 말로 대꾸하
였다. 그러면서 내려서 자동차의 모습을 잘 보라고 하였다. 자동차의 뒷바퀴는 교량위에
그리고 앞바퀴는 허공에 있었고 바로 차체의 앞부분을 나무가 받치고 있었다. 결국 나무
기둥 위에 내 자동차가 얹어져 있음을 보고 나는 너무나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참으로 기적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둘 수
가 있었다. 그러나 경찰들이 내 차를 다시 교량위로 끌어내어서는 나는 계속해 운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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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할 수가 있었다. 경찰들은 측면 바람의 압력에 안전 하려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
고 충고해 주었다. 교량위를 달릴 때에는 반드시 속도를 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사
건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었는데 다시금 기억이 생생해졌다.

1996년말로 기억된다. 남원약수온천개발 사업으로 인하여서 한국에서 경제사절단 약 10


명이 스위스 취리히를 방문하였다. 물론 내가 통역자이면서 안내자였기 때문에 모든 일
정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들은 융프라우반을 타고 융프라우요흐의 정상에까지 올라가 보
고는 스위스의 관광개발의 역사에 대하여서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는 3명은 통일된 독일
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여서 수도가 된 베를린을 방문코자 하였다. 나는 취리히에서
렌터카 (Europe Car)로 3명을 차에 태우고 취리히에서 바젤 – 바덴 바덴 – 프랑크푸르트
– 아이제나흐 – 마그데부르그 – 베를린의 아우토반을 달려서 8시간만에 베를린에 도착
하였다. 거기에서 하루 숙박하고 다음날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보고나서 한국손님 3
명은 비행기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서 서울로 직행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베를
린에서 취리히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고 렌터카 한 자동차는 베를린 공항에서 반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베를린 구경을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가 베를린 공항에 도
착하였는데 시간이 얼마남지 아니하였다. 나는 일단은 렌터카 자동차를 반납하고 먼저
손님들을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의 탑승수속을 지켜본 다음에 취리히행 비행기에
탑승수속을 할 계획이었다. 무사히 손님들과 작별인사를 하고서 다른 트란지트게이트로
가서 취리히행 탑승수속을 하려고 하였다. 시간이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런데 탑승수
속을 다 마쳤으니 탑승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눈이 많이 와서 15분 일찍 이륙하기 때문
에 탑승수속을 일찍 끝내야 한다고 방송을 여러 차례 하였다고 하면서 나의 탑승이 불가
능하다고 하였다. 이미 비행기는 게이트에서 떠나서 활주로로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이었다. 나는 급히 다시 공항의 렌터카 (Europe Car)로 가서 반납한 자동차를 다시 내어
달라고 하고는 자동차로 취리히로 향하였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아우토반에서 조
심조심하여서 취리히로 향하였다. 무려 13시간만에 새벽 5시에 나는 취리히에 도착하였
다. 혜성이가 문을 열어주면서 내 목에 매달리면서 막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왜그러느냐고 물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한시
간만에 취리히에 도착하기로 한 그 비행기가 취리히공항의 활주로에서 미끌어져서 화염
에 휩싸여 탑승인 전원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뉴스를 들은 혜성이는 내가 그 비행기
로 취리히로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내 인생은 그때에 마친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행기를 타지않고 자동차로 온 것이 너무나 다행하고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는 것이다. 옛날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사고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또렷또렷한 어머님의 음성이 내 귓전에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이야기 했는 바 대한항공 뉴욕발 K001기 격추사건 때에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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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앨라스카 원주민 상호신용은행의 투자합의서
류를 형님집에 놓아둔 사건으로 인하여 그 비행기를 타지 아니하고 다음날 다른 비행기
편으로 귀국하였다. 나중에 바로 내가 탑승하려고 하였던 그 비행기가 격추되어서 전원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기필코 천재지변이나 대형사고로 인하여서 이 세
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뻔 하였던 일을 여러 번 체험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액운을
비켜간 것이 내가 77세의 고령에까지 무사히 이르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나의 생명이 무사한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나
는 지금도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20대의 청소년 그리고 김소위 시절이 참 훌륭하였다
고 생각된다.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는 인생의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다. 지식이 많
으면 무엇하겠는가?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큰 명예를 얻었다고 하면 내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남들은 나의 인생을 보고 허송세월을 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돈도 벌지
못하고, 명예도 얻지 못하고 학벌도 없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였는가? 77세가 되어서 내
어 놓을 것이 없지 않는가? 사실이 그렇다. 나는 허송세월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때가 내것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한국에 살면 그
곳이 내 공간인가? 내가 독일에 살면 거기가 나의 집인가? 이 세상은 어디에라도 나의
본 고향은 될 수가 없었다. 나는 끝없는 배회자 방랑자의 신세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러면 77세가 되기까지 그 시간이 과연 나의 시간이었는가? 아니다 나는 항상 나의 시간
은 현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지금 여기가 곧 나의 설 자리이고 나의 누려
야 할 시간이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떠난 타향살이로 한
평생 살아왔다. 그러나 불가불 내가 자랑할 것은 나는 마치도 외계인처럼 살아온 것이다.
나는 한 순간도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
에 속해 있지 않은 자신을 영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고등학생시절에 “나
의 십계명”을 따로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닌 일이 있었다. 두 가지의 계명은 지금도 내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돈과 여자는 멀리한다. 2) 이 세상에 있으면서 외계인처럼 살
아간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돈과 명예와 건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에게 돈의 유혹이 없지 않았다. 나에게 미모를 가진 여인의 유혹이 없지 않
았다. 나에게 건강에 대한 권유도 없지 않았다. 보약을 먹어라! 건강을 위하여 헬스케어
를 하라! 오래 살려면 이런 저런 것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모두가 다 부
질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에게서 사는 보람은 무엇인가? 나는 매일같이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면서 살
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3) 나는 누구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나? 4) 나는 왜 이 세상
에 속하면 안 되는가?

우리의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는다. 내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잠시 몸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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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만 영혼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을 “의인들의 회중”이라고 하였다. 영혼
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 있다. 거기에로 나는 되돌아 갈 것이다. 나는 그 “의인들의 회중”
으로부터 이 세상에 왔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속해야 할 곳이
아님을 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하
였다. 지금 여기에 기록하는 나의 인생회고록은 한 외로운 영혼의 방랑기에 지나지 않는
다. 나는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나에게 되어진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있
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것 하나도 과장할 필요도 없고 또 없는 사실을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있었던 일들을 없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나
의 지나온 과거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한 역사가의 입
장에서 기록 하였다. 나는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에 접어든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20세기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잊혀진 20세기”라는 글을 집필하였다.
그리고나서 나는 나에게 알려진 일들을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다물논고 삼부작이다. 그 밖에 남의 나라이지만 그리고 내가 살았던 시대가 아니지만 나
치독일의 역사를 따로 기록하였다. 그것이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제3제국의 흥망성
쇄사”이다. 그 밖에 나의 단편적인 산문형식의 글들이 있다. 단행본으로 인쇄하여 출판해
낸 책자로는 “21세기 핵시대의 여명”이라는 글이 있다. 이는 20세기에 대두된 핵과학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의 참상을 재구성
한 역사소설 “히로시마여! 안녕!”이라는 글도 있다. 만일에 신국판의 판형에 300쪽 정도
내외의 책자로 출간해낸다면 나의 지금까지 쓴 글들은 20여권에 해당된다. 거기에 20여
년간 이어온 나의 음악활동은 그 일부분이 동영상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우주신앙에
관한 특강과 오케스트라 지휘한 음악활동들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
두가 다 나의 삶의 흔적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나는 이 시대에 이 공간에 속해 있
지 않은 상태로 처신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의 흔적은 미래의 어느 때를 예비
한 것 들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지
혜도 폐하고, 사랑도 폐하고, 권세도 폐하고, 부유한 재산도 다 없어지는 것들이다. 그러
나 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지금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 자로서의 삶의 흔적이 훗날 없
어지지 아니하고 기억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외계인
처럼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다가 나의 생을 마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무
리를 지으려고 하는 나의 스스로의 이야기는 내 자신을 위하여서는 “외로운 자의 음성”
으로 일관된 글이나 먼 훗날 자기네들의 시대를 예비한 사람이라는 인정이 보여질 때에
는 나는 외로운 자가 아닐 것이다. 미래의 그 이름모르는 이들과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될
것은 분명하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지상에서 사용하는 화폐는 사용되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에 어떤 부


자가 죽어서 그 영혼의 세계로 금덩이와 화폐뭉치를 둘러메고 나타난다면 얼마나 바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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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영혼이겠는가? 영혼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오직 파장일 뿐이다. 우리들의 영혼
이 파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파장을 대표하는 분야는 음악이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음악이 가장 중요한 화폐일 것이다. 바하, 베토벤, 모챠르트, 슈베르트, 쇼팽,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챠이코프스키 등은 영혼의 세계에서 대재벌일 것이다. 그들은 작
곡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부유한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
고 그 다음의 부유한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하고 감상하고 음악을 가까이 한 사람들일 것
이다. 지상에서 돈이 많아 부유했던 사람들이 음악을 모르면서 살았다면 그들은 영혼의
세계에서는 걸인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존재임으로 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작곡을 못하면 악기라도 연주를 해야 한다. 악기를 연주할 형편이 못되면
반드시 음악회에 가거나 동영상을 통하여서 음악에 심취하는 생활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파장이 곧 화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
양하라는 말이 자주 보인 것이 아닐까? 다윗과 솔로몬은 이 지상에서 부족할 것이 없이
살았던 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음악에 갈급한 인생을 살았다. 그들이야말로 영혼의
세계에서 풍요로운 존재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 나의 노년시절에서 해야 할 일
은 오로지 음악 뿐이다. 음악을 하다가 나의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물론이요 저 세상 곧 영혼의 세계 “의인들의 회중”에서도 가장 보람있는 존
재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 아래서 보면 돈으로부터의 부귀영화, 권세로 얻은 큰 명
예, 각종의 노력으로 얻은 장수비결…..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하챦은 그리고 부질없는 물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생은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
는가?

10. 나의 노년시절 [3]: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경계선

나는 77세가 되기까지 오로지 학문하는 열정으로 내 인생을 영위하여 왔다. 지금도 학구


열 하나만은 나의 마지막 남은 정신적인 자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나의 예술의 세
계로 정진하려는 예술혼 역시 지금 소유하고 있는 큰 자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25
세의 나이에 독일유학 당시부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경계선을 수 없이 넘나들었다.
예컨데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야말로 형이하학으로는 하드웨어를 파악해야 하고 형이상학
으로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컴퓨터문화는 형이상학과 형이
하학의 종합적인 분야로 파악되어지고 있다. 나의 형이상학에 대한 기본적은 관심사와
학문적인 훈련은 아버님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과 칸트철학을 평생 공부하신 김
기석(金基錫)교수님은 국내에서는 으뜸가는 철학자의 명분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하신 분
이다. 그런데 나의 할아버님 김승택옹(金承澤翁)은 나에게 형이하학의 관심을 일깨워 주
신 분이다. 그는 신관에 있어서는 무신론자였고 자연과학과 공학에 대한 관심사가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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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었다. 이러한 나의 할아버님은 젊은 시절에는 간척사업으로 토지를 새로 얻어서 부
자가 되신 분이다. 북한의 용천의 다사도 연안을 거대한 방파제로 막아서는 토지를 간척
하셨다. 그리고는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하여서 담수를 만들어 새로 얻은 토지에서 경작
이 가능하도록 일제하에서 전문인력을 동원하였던 분이다.

그러한 할아버님은 강원도의 경포대를 막아서 토지를 새로 간척하려고 절반을 매몰한 처


지에서 해방이 되자 일본인 전문가들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어서 공산주의자들
의 토지개혁법에 의하여서 경포대의 간척지는 몰수되고 말았다. 지금도 경포대의 호수는
반달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온전한 원형의 호수의 절반을 나의 할아버님이 막아서
간척사업을 하신 흔적으로 남은 것이다. 이러한 분이라서 김승택옹은 아버님의 형이상학
의 분야와는 많은 상반되는 논리를 전개하시곤 하였다. 내가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다닌
다고 하는 것을 할아버님은 몹씨 못마땅해 하셨다. 그는 신학과라고 하는 학문분야의 과
목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신앙의 대상은 될 수가 있
어도 역사적인 인물로 연구하는 대상은 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셨다. 타작마당에서 알곡
이 전혀 나오지 아니하는 작업에다 비유하셨다. 한 시간 전에 일어난 교통사고에서 진위
를 가려내는 일에도 증인들의 여러가지의 의견으로 인하여서 시비가 가려지기가 힘이 들
거늘 2천년 전에 남의 나라인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찌 역사적으로 규명하겠
는가고 반문하셨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다. 그는 남의 신앙문제를 거론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면서도 무슨 신학연구
를 하느냐고 나의 대학생활을 맹렬히 비난하셨다. 물리학이나 공학을 공부하여서 국가와
민족에게 이바지 하는 길을 먼저 생각하라고 하셨다. 내가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피아노
를 열심히 연습하는 것을 예의주시 하셨으나 막상 내가 서울음대의 피아노과에 진학하고
자 하는 것에 대하여는 결사적으로 반대하셨다. 할아버님에게는 바하, 모챠르트, 베토벤
음악의 차이는 없는 것이었다. 그저 듣기 좋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피아노 건
반에서 손을 놀리는 것을 4년간 공부하는 피아노학과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
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피아노음악이 좋으면 피아노를 만드는 기술적인 공부를 하는 것
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나의 할아버님 김승택옹은 팔순에 이르러서 미국의 아폴로 달 탐사계획이 신문에 보도된


것을 스크랩하여서 여러 번 읽기도 하셨다. 그러면서 동네 영감친구들에게 신문의 내용
을 설명하게 되면 전혀 이해를 못한다고 말씀 하셨다. 한번은 나에게 아폴로 8 계획에서
3명의 우주인들이 달까지 접근하여서 달의 뒷면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돌아왔다는 기
록을 동네 할아버지 친구들에게 비유하여 설명하신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기존 총
알의 속도보다 빠른 특수한 총을 움직이는 찌프차에 장착하고 태평양을 건너서 또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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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도 하여서 뉴욕상공에서 날고 있는 독수리의 눈알에 명중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
셨다. 달도 움직이고 지구도 움직이고 엄청난 거리를 지나서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는 달에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실을 비유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할텐데 그만큼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불가사이한 일을 미국
의 나사에서 지금 행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나에게도 그러한 비유가 적중하는 이야
기로 들렸다. 나의 할아버님은 그만큼 형이하학의 발전에 심취되신 분이었다. 항상 나에
게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아니면 기계공학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님을 통하여서 자연과학과 공학분야에 관한 관심을 도외시 하지 않는
가운데 아버님의 철학과 윤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꾸어 나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
는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가지를 더 첨언할
내용이 있다. 우리는 6.25 동란이후에 1958년경 성동구 신당동의 일본인들의 저택 (적산
가옥)에서 살았다. 그곳은 당시로서는 고위관리나 사업에 성공한 부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한여름 더운 날씨에 할아버님께서 저녁때에 집에 들어 오셨다. 그런데 깊은 시름의 한숨
과 함께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거 큰일이 났구나! 우리는 당장에 여기를 떠나서 이사를
가야 하겠다. 바로 우리의 건너편 앞집 (일명 대사관집)의 외교관 저택에서 무슨 파티인
가 하는 모양인데 댄스라는 걸 하더구나. 젊은 남녀가 아예 배를 꼭 가져다 대고는 덩실
덩실 춤을 추는데 오늘밤에 무슨 일이 생겨날 거 아니겠냐? 이러한 퇴폐된 동네에서 속
히 이사를 가야겠다.” 우리집 바로 건너편에는 여러 나라에서 대사를 지낸 분이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담이 낮아서 거실에서 춤추는 장면이 넘겨다 보였던 모양이다.
할아버님은 미국으로부터 퇴폐된 생활풍조가 들어와 우리 사회에 편만하게 될 것을 심히
우려하신 경우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윤리관에 젖어 계셨던 할아버님은 우리 집안의 가
정교육에 매우 엄격하신 분이었다.

내가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것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래도 기


독교신자로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겠다는 나의 신념에는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기독교역사나 예수님의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내는 일은 무모한 노력이라 하셨다.
거기에 공을 드리는 노력이면 물리학이나 공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압도적
이셨다. 나는 독일유학에서 컴퓨터프로그래밍을 배우면서 항상 할아버님을 생각하였다.
그 분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나의 20대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나는 열심히 자연과학분야
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그 중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하이젠베르그 교수의 양자물리학과
바이츠제커 교수의 물리학 전반에 관한 강의를 수강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독일관념
론과 니체의 철학에 심취하였다. 내게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조화가 올바른 의미의
학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신플라톤학파의 우주관 그리고 신피타고라스학파의 수학적인 세
계관 등을 알기 위하여서 나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파
스칼의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나의 지나간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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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분야에서 성실한 인생을 영위하여 온 것이 분명하다. 형이상학, 형이하학, 음악예
술….. 이 세 분야에서 나는 전문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혼신의 노력을 기우려 나의 최
선을 다하여 연구하였다. 지금도 나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나에게 정
년퇴직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음악예
술에 대한 나의 관심사가 더 첨예하여졌다. 우주물리학, 우주입자물리학, 양자물리학, 양
자역학, 생물학, 의학 등 나의 관심사는 넓은 영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음악예술에만 몰입하고자 한다. 나는 그 동안에 지휘를 많이 하였다.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인생은 긴 세월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추구하여 온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탐구하고 연구한 것을 논문으로 기록하였다. 나의 전집은 출판해낸다면 20권에 달
할 정도이다. 거기에 20여년간 부단히 노력한 나의 음악활동은 그 일부분이 유튜브에 올
려져 있다. 이제 나에게 얼마나 더 많은 인생의 시간이 주어질 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대장암수술 이후에 나는 건강한 모습으로 하루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돈이
나 명예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건강문제 역시 창조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왔다.
이는 24세때의 한상열소령의 수첩에 메모된 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모습으로 살기는 결코 수월하지 않다. 지금도 나
에게는 세상에 속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세를 장악하고 건강관리에 힘쓰라고 하는 세
속적인 유혹이 난무하다.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생각하
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다.

2017년 12월 31일에 나는 또다시 이상스런 사건을 체험하였다. 이는 4년전 2014년 1월


3일 새벽에 나타난 바로 그 흰옷을 입은 키가 큰 청년이 내 앞에 서서 하는 말이 “왜,
약속을 안 지키는가? 음악을 하라고 생명을 연장하였는데 왜 음악을 하지 아니하는가?”
였다. 나는 다소 짜증을 내는 어조로 “이 세상에 음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
까? 왜 내가 음악을 해야만 합니까? 나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참
동안 묵묵히 있더니 그는 침착한 어조로 내게 말하였다. “네, 그렇지요. 지구촌에서 음악
은 차고 넘칩니다. 지구는 우주에서는 음악별이지요. 너무나 많은 음악들이 연주됩니다.
그런데 듣기 좋은 음악이 없군요. 김선생님의 음악이 듣기가 좋아서 부탁하는 겁니다. 음
악을 계속하세요. 그러면 건강한 생명이 연장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지금도 생각해본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 나는 사실 지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
다. 아마츄어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 하곤 하였다. 물론 나는 어느 전문지휘자에게 못지
않을만큼 사전에 공부하고 준비하여서 지휘하는 일에 임하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에
서 정성을 드려서 리허설을 하게 되면 단원들은 거의 나의 의견을 땨르곤 하였다. 슈베
르트의 심포니 (The Great) 을 지휘할 때였다. 보통 3회정도 리허설을 한다. 그런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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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전과 오후에 두 번씩 리허설을 하여 총 6회의 리허설을 하였다. 그래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계속해 나의 지휘하는 노력과 함께 하였다. 사실로 나의 음악이 우주로 퍼져나
가면서 “듣기 좋은 음악”으로 천상의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 내 자신에게
물어보게 된다. 어떻게보면 바하, 모챠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모두 다 아마츄어 음악가
였는지도 모른다. 만일에 정규음악대학을 다녀야만 프로급의 음악가라고 한다면 그들은
음악대학을 다닌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음악교육기관이라
고 하는 것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음악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사사하여서
음악을 배운 것은 사실이다.

2018년 3월 18일 서울에서


김정양 (金政陽)
Email: 1941bach@gmail.com
chungyang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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