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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새로운 고찰

- 영국의 성공회 주교 George Bell의 영향과 함께 –

서론

1. 본회퍼에 대한 시대적인 조명

2. 죠지 벨 (George Bell) 주교와 디드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3. 스웨덴 시그투나 (Sigtuna)에서의 벨 주교와 본회퍼와의 만남

4.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 0시에서 (Freiburger Denkschrift in der Stunde Null)

5. 질서 자유주의 경제유형 (Ordoliberalism Economic Pattern)

6. 본회퍼와 안중근, 세계사의 심판대 위에서…

7.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

8. 본회퍼의 세계사적인 유산 (World Historic Legacy)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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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나라는 세계사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남북대립의 긴장의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통일에 관한 이야기는 빈번하나 남북간의 이념의 차이는 역사적인 소명의
식의 부족으로 인하여서 실현될 수 없는 공론일 뿐이다. 동서독이 통일된 것은
세계사적인 축복의 현장이라서 가능했다고 흔히 이야기하나 독일국민의 내면적인
사상의 근저가 우리와 달랐기 때문에 통일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단이
되어서 40년 내지 50년의 세월 동안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는 이질적인 면이 언
어에서 그리고 사고방식에서 현저해지게 된다. 그래도 동독과 서독은 통일이 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서독의 상당한 경제력으로 인하여 경제파국에 처한 동독을
흡수하는 형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세상에 이미 알려진 바이다. 통일이 된
20년 후에는 그간의 이질적인 면모들이 저절로 해소가 되었다. 만일에 우리나라
의 경우 남과 북이 통일이 되려고 한다면 우선에는 경제력의 제한으로 인하여서
독일과 같은 통일은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거기에 북한의 완
강한 전체주의 공산주의 주체사상 등은 한반도의 통일에 관하여서는 역사적인 역
방향의 길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1990년에 세계사의
축복의 현장이었던 동서독의 통일의 순간이 그립고 또 부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러한 오늘의 세계사 내지는 한국사에서 독일의 통일의 축복의 현장이 부럽기는
하지만 본회퍼는 그 이전의 일인데 이러한 이전의 독일에 대한 관심이 과연 우리
들에게 필요한가? 디트리히 본회퍼에 관하여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오늘을 살
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부질없는 그리고 또 머나 먼 다른 나라의 다른 시간대의
역사에 관심을 두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디트리히 본회퍼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는 어떤 사람
이었는가? 단순히 목사였고 신학자였고 가장 충실히 그리스도를 따른 제자였다고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 아니한가? 그리
고 그는 유럽의 독일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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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철통같았던 나치독일에 항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항복 직전에 교수형을 받아 생을 마쳤다. 그런데 한편 독일의
근대사에서 히틀러인가 본회퍼인가 하는 명제를 놓고서 히틀러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사를 능가하고 히틀러의 생각하였던 모든 것을 극복한 금세기의 현자로 인정
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회퍼에 관하여서 새롭게 이해를 한다고 하는 것
은 무엇인가?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 단순히 알려지지 아니하였던 숨겨진 사실이
들어났다고 하여서 새로운 것인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아니한 사건들을
가지고 재조명 해 본다고 하면 본회퍼를 새로운 각도로 이해하는 일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의 축복의 현장 즉 독일의 통일된 당대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고 하면 서독의 민족중흥 및 경제부흥과 사회정의 등에서 본회퍼의 사상적인
기틀이 그러한 축복의 역사의 현장을 가능케 한 것은 분명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봄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현실을 올바로 일으켜 세우는 일
에 있어서 한 사람의 본회퍼의 존재가 어찌하여서 절실한 것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지금 이러한 관점에서 디트리히 본회퍼를 재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
이다. 그런데 우연한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안중근과 본회퍼는 세계사의
광장에서 비교가 될만한 역사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논고의 후반부에
서는 본회퍼와 안중근을 비교해 보았다. 안중근은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경건한 마음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고, 뤼순의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의
날에는 특별히 자신에게 영세를 주고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을 깊이 교육시켜 준
황해도의 교구장 죠세프 빌렘 신부를 뤼순의 형무소로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하고
그에게 고해성사를 바치면서 역사의식과 애국심의 발로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
하였으나 천주님에게는 죄를 범한 것으로 생각되어서 이를 반성한다고 하는 고해
성사를 신부님께 바치면서 천주님께 중보기도를 부탁한 이후에 경건한 미사집전
을 마치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태도 역시 본회퍼와 매우 유사한 죽음에
대한 소신과 마음의 여유를 보였던 것이다. 이 짧은 논고에서 본회퍼와 안중근을
세계사의 광장에서 서로 비교해 보면서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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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회퍼에 대한 시대적인 조명

1894 년에 러시아에는 니콜라이 2 세 (Nicolai II)가 챠르로 등장하였다. 그는


18 세기의 산업혁명 (1760-1820)과 프랑스혁명 (1789)이라는 세계사의 커다란 두
개의 사건이 있은 후에 러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의 군주가 된 것이다. 그는
1899 년에 이른 바 "만국평화회의"라는 것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하였다.
그의 야심은 세계를 제국주의의 정치체제로 통일시키고자 함이었다. 24 개국이
참가한 제 1 차 만국평화회의는 자세히로는 “평화회의”가 아니고 “전쟁규정회의”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육상전 즉 대륙내에서 벌어지는 제반 전쟁의 양상을
법적으로 규정을 지으려고 한 국제회의였다. 그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이러한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한 것은 당시의 네덜란드가 해양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이미 국제법을 창시한 휴고 드 그로티우스 (Hugo de Grotius)가 네덜란드 출신의
법학자, 철학자,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육상전쟁의 양태를
합리화하고 제도화하는 의견으로써 의정서를 고안하여서는 당시의 선진국
24 개국의 동의를 얻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1907 년에는 제 2 차 "만국평화회의"라는 것을 또다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소집하였다. 챠르 니콜라이 2 세의 야심은 육상전 뿐만 아니라 해양전까지도
그와같이 합법화하고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는 두 번에 걸친
"만국평화회의"를 통하여서 제국주의의 군사력으로 육상과 해상 전체를
장악하고자 한 제국주의의 야심에 찬 국제회의였다. 그런데 1914 년에 제 3 차
만국평화회의를 계획하였으나 제 1 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하여서 무산되었고
1917 년 볼세비키혁명 이후에 1918 년에 챠르 니콜라이 2 세 가족전체가
시베리아의 예카테린부르그에서 몰살 당하는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서 그의 제국주의 세계제패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인가?
1918 년 세계 제 1 차 대전 후에는 지구상에서 제국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우선 독일의 제국주의는 빌헬름 2 세 황제의 네덜란드
망명으로 끝나고, 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는 황태자 페르디난드의 암살사건으로
끝나고, 일본의 명치제국주의 역시 제 1 차 세계대전의 종국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또 1905 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다. 이는 자세히로는 "을사망국조약"이라고 해야 할 사건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자기네들의 제국주의체제가 천년 만년 동안 존속할 줄로 알았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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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야말로 세계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식은 부족한 민족이다. 그들이 신을 알고
인간을 알고 역사를 바로 안다고 하면 오늘날 일본이 세계평화에 이바지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피의 일요일 (1905 년 1 월 22 일 러시아 쌍페터스부르그)

니콜라이 2 세 앞에서 당시의 러시아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탄원시위를 하였다.


니콜라이 2 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탄원서를 손에 든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대에게 당시의 실권자 그레고리 라스푸틴(Gregory
Rasputin)의 유혈진압의 발포로 인하여서 천 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이
사건은 1917 년 공산주의 러시아혁명으로 연결이 되게 된다. 이러한
평화시위대는 또한 당시의 러일전쟁을 중단할 것을 요망하기도 하였다. 이날
"피의 일요일"의 소상한 역사를 당대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교향곡
제 11 번 "1905 년"에서 음악으로 프레스코화하여서 인간의 마음속에 각인하였다.

△제 1 악장 Adagio (The Palace Square) 느린 템포로 진행되면서 첫 부분은


참사가 일어나기 전 겨울궁전 앞 광장의 싸늘한 정경을 그리고 있다. 하프를
배경으로 약음기를 낀 현악이 `광장의 테마'를 연주하자 음산한 팀파니와 불길한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구슬픈 혁명가에 이어 억제된 선율이 무능한 황제 밑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을 토로하는 듯하다.

△제 2 악장 Allegro (The 9th of January) 제 1 부에선 민중가 〈오 당신! 우리의


대부이신 황제여〉가 나오고 신호나팔소리와 함께 잦아들면, `모자를 벗자'의 슬픈
주제 선율이 금관 합주로 울려 퍼진다. 제 2 부에선 앞서 나왔던 선율들이 한층
격앙된 흐름을 보이면서 분노와 저항을 드러내고 군중의 외침과 울음 등이
떠오르는 듯하다. 돌연 폭풍 전야 같은 정적이 흐르며 `광장의 테마'가 들리고
잠시 후 갑작스런 작은북의 연타가 정적을 깬다. 군대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진다. 격렬한 푸가토가 공포에 빠진 군중을
나타내고 타악기들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군대의 모습이 그려진 후 다시 정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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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른다.

△제 3 악장 Adagio (Eternal Memory)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불멸의


희생자들이여, 그대들은 쓰러졌구나'의 선율이 엄숙하게 흐르는 음울한 분위기가
이어지다 그것을 딛고 일어나듯 `안녕, 자유여!'의 밝은 선율이 등장하며 감격적인
찬가로 고양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는 `모자를 벗자' 선율이 복수의
맹세처럼 울려 퍼진다. 마지막에는 처음의 주제가 다시 등장해서 자유롭게
변주되며 슬픔의 극복과 혁명의 결의를 다지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제 4 악장 Allegro non troppo (Tocsin) 비극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민중의


모습을 묘사한다. `격노하라, 압제자들이여' 선율을 관악기가 힘차게 연주하면서
타오르는 혁명의 기운을 부각시킨다. 클라이맥스에서 다시 `모자를 벗자' 동기가
등장한 후 혁명가 `바르샤반카'의 선율이 결연하게 전진하는 군중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코다로 접어들면 실패로 막을 내린 `제 1 차 러시아 혁명'의 숙연한
흐름이 떠오른다. 잉글리시 호른이 `모자를 벗자'의 선율을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호른의 라이트모티브 연주와 함께 경종이 울리면서 장렬하게 마무리된다.

피의 화요일 (1919 년 4 월 15 일: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1919 년 3 월 1 일에는 한반도에 국민전쳬의 민족적인 항일시위가 일어났다. 3 월


3 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있은 후 3 월 1 일의 민족적인 봉기는 점차 한반도
전체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4 월 15 일 제암리교회에 모인 민간인을
일본 군인들이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1905 년 8 월 5 일 건립된 제암리교회(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는 H. G.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 후 교인들의 증가로 1911 년 교회
건물이 마련되었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장날이었던 3 월 31 일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주민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 사격 끝에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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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부터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4 월 3 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경찰은 4 월 15 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 민가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했다. 후에 이 사건은 '수촌리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과 한국의 “피의 화요일”은 한가지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회의
빈민층의 인권보장과 사회개혁을 부르짖다가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경우이다.
제국주의 독재하에서 양민들이 학살을 당한 점에서 비록 장소와 때는 달라도
같은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제국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 아래서
항거한 점에서 이 두 사건은 20 세기초엽에 세계사에 등장된 비극이었다.

이러한 1905 년의 러시아에서의 생겨난 사건과 1919 년에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세계사의 비극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아니한 채 지구촌의 어두운 역사로
남아있다. “만국평화회의”라고 위장한 지구촌의 육상 및 해상 전쟁의 적법화
내지는 타당성부여 등의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야심은 1918 년 제 1 차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에는 전체주의, 군국주의의 나치독일과 대
동아를 꿈꾼 일본이 다시금 무력 및 독재적인 정치체제로 세계제패에 나선
그릇된 역사적인 현현이었을 뿐이다. 제국주의의 뿌리는 전체주의 군국주의 등의
가지들과 무성한 잎사귀들로 20 세기를 뒤덮었다. 헤겔은 "세계사는
세계심판이다"라는 명제를 이야기 하였다. 세계사는 이러한 제국주의 내지는
전체주의 세계제패의 꿈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를 제지 억제키 위하여서
세계사는 한 역사적인 인물인 디트리히 본회퍼를 유럽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는
나약한 볼품없이 보였던 무명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양심적인
청년이었다. 본회퍼는 또한 그러한 양심적인 청년으로서 39 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도
강한 무력과 정신력으로 그는 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상의 근저에는 우리나라의 1919 년의 이념이 이미 초석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어느 의미로는 우리나라의 삼일정신으로 채워진
독일인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처했던 시대적인 상항은 바로
우리나라의 1919 년의 이념으로 적셔진 사상의 밑걸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회퍼의 시대를 조명해보는 것은 한 유럽인 자세히로는 한 독일인의 사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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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소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타남은 곧 우리들의 사상과
우리들의 역사적인 소명이었다고 이해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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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죠지 벨 (George Bell) 주교와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33년 1월 30일에 나치독일이 출범되었다. 이때에 본회퍼는 설교를 통하여서 히


틀러의 “인도자(Fuehrer)”라는 개념을 맹렬히 비판 하였다. 히틀러는 올바른 의미
의 “인도자”가 아니라 “그릇된 인도자 (Verfuehrer)”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본회퍼는 영국 런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영국의 성공회 주교 죠지 벨 (George Bell)은 그때에 에큐메니칼 운동인
“생명과 과업 (Life and Work)”에 관한 회의로 스위스의 제네바를 방문코는 독일
로 가서 나치독일의 출범의 현장을 답사하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
에 나치독일의 출범과 함께 유대인들에 관한 압박을 예견하였다. 1933년 11월 벨
주교는 런던에서 목회하고 있던 본회퍼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만나자
마자 독일에서 일어난 나치정부의 출범을 염려하는 대화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1934년 5월 독일의 “고백교회 (Bekennende Kirche, Confessing Church)”의 결성에
벨 주교와 본회퍼는 함께 하였다. 당시 나치독일의 출범과 함께 히틀러에게 동조
하였던 많은 교인들 일명 “독일기독교인 (Deutsche Christen)” 들과 반대하기 위
하여서 “고백교회”는 결성된 것이다. 벨 주교와 본회퍼는 게르만민족이 “아리안족
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나치독일의 이념을 숭상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단
종교를 신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치독일의 출범 처음부터 벨 주교와 본
회퍼는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백교회운동”을 통하여서 나치독일 천하
에서의 기독교교회를 위한 투쟁 (Kirchenkampf, Church Campaign) 을 감행하였다.
그들의 반나치운동은 이미 초창기에 “고백교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의 독일
내에서는 6천만의 인구 중에서 4천만이 프로테스탄트 (루터교와 개혁교회) 교인
들이었다. 그 중에서 나치독일에 동조한 이른 바 “독일 기독교인 (Deutsche
Christen)”은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 그만큼 기독교교인들이 앞을 다투어서 나치독
일의 체제에 초기부터 동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만일에 “고백교회”의 결성이 없었
다고 하면 독일의 기독교교회는 전부 나치독일의 기독교로 변전하게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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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국의 벨 주교와 본회퍼의 노력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

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회퍼의 “고백교회”운동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바 있으나 초창기부터 영국의


성공회 죠지 벨 주교의 협조가 절대적인 의미를 차지하였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
지지 아니한 사실이다. 1934년 6월 1일 “바르멘 신앙선언 (Barmen Declaration)”
에 영국의 벨 주교와 본회퍼가 함께 참석해 조인하였다. 1936년에는 벨 주교는
영국에서 독일로부터 피난해오는 유대인 난민들을 수용해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
으로 나섰다. 1938년 11월 이른 바 “수정의 밤” 사건에서 유대인들의 은행과 금
은 보석상들을 강탈하는 나치독일을 떠나는 유대인들은 모두 영국에서 받아 드려
졌다. 그 중에 90인의 기독교신자들은 벨 주교가 특별히 영국내의 독일인들을 위
한 교회에서 안전히 보호를 받도록 주선 하였다. 또 벨 주교는 유대인 학자들과
예술인들을 많이 보호하였다. 그래서 암암리에 독일판도로부터 유대인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영국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정부를
통하여서 연합국이 독일에다 융단폭격을 하여서 제반 문화시설들을 파괴시키고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야기시키는 일을 중단하여 달라고 하는 성명을 발표하기
도 하였다. 그는 특별히 처칠수상을 면담하여서 드레스덴 폭격을 반대한 일도 있
었다. 이러한 영국의 벨 주교의 적극적인 반나치운동이 없었다고 한다면 디트리
히 본회퍼의 반나치운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나치독일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벨 주교의 영국의 배경과 그의 전 세계에다 반나치운동
을 알리는 일이 본회퍼에게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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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웨덴 시그투나(Sigtuna)에서의 벨(Bell) 주교와 본회퍼
(Bonhoeffer) 와의 만남

1942년 5월 30일에서 6월 3일까지 스웨덴의 시그투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지극히


은밀한 중에 벨 주교와 본회퍼는 만나서 심각한 회의를 하였다. 영국이나 독일내
에서는 혹시라도 공개될 것을 우려한 매우 비밀스런 그리고 심각한 내용의 회의
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그투나는 스톡홀름의 북서쪽 약 50킬로미터에 위치한
웁살라와도 가까운 지역의 한 작은 마을이다. 바로 거기에서 벨 주교와 본회퍼는
비밀리에 회동을 하였던 것이다. 거기에서 의논된 것은 나치독일의 물리적인 해
체 즉 히틀러와 수뇌들을 암살하는 계획이었다. 벨 주교는 사전에 처칠 수상에게
영국에서 이러한 비밀스런 계획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한 바 있다. 그러나 처칠
은 그러한 일은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며 전쟁중에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이
자신의 소신이라고 하면서 반대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벨 주교는 본회퍼
를 중립국인 스웨덴의 이름없는 작은 마을 시그투나에서 만난 것이었다. 거기에
서 논의된 중요한 의제는 나치독일이 패망한 이후에 독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
화 등에 관한 심각한 의논이 있었다. 벨 주교의 이러한 제안에 힘을 얻어서 본회
퍼는 히틀러와 그 주변의 나치독일의 수뇌들을 처치할 계획을 지하조직으로 시작
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바로 그해인 1942년 10월 9일에 프라이부르그로
가서 그곳의 대학교수들 9명과 함께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을 작성하게 된다. 오
늘날에는 스웨덴의 이름없던 시그투나에서 거의 년례행사로 반나치운동에 앞장섰

던 벨 주교와 본회퍼를 기리는 행사들을 거행한다.

벨 주교는 1933년도 나치의 출범때부터 영국의 일급 첩보원 지기스문드 페인 베


스트 (Sigismund Payne Best)로부터 상세한 독일에 관한 정치적인 상항을 보고 받
은 일이 있었다. 베스트는 유창한 독일어와 독일인을 닮은 외모 및 성격 등으로
인하여서 제1차 세계대전때부터 독일판도내에서 영국을 위한 첩보활동을 왕성히
전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미 벨 주교에게 나치독일이 시작되면서 이를 좋아하
지 아니하는 세력들이 군장성들 정치인들 그리고 귀족출신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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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많이 있었으며 1942년도에는 1933년때부터 히틀러와 나치정부를 거부한
사람들의 지하조직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독일판도내에는 “검
은 오케스트라 (Black Orchestra)”라는 반나치사상을 가진 유력인사들의 비밀조직
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공산주의 편에서도 나치정부를 반대하는 세
력들이 있는데 이는 “붉은 오케스트라 (Red Orchestra)”라는 지하조직이라고 하였
다. 벨 주교는 이러한 나치정부에 반대하는 지하조직들과 연결하여서 나치정부를
물리적으로 해체시키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나치독일의 천하
는 유럽대륙 전체와 북부 아프리카, 흑해연안의 우크라이나와 벨로러시아 또 동
쪽으로는 고대 페르샤지역 오늘날에는 이란과 이락의 영토에까지 진입하였다. 그
리고 일본은 1941년도에 진주만공격과 함께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거의 다 진멸
하였고 이미 20세기초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바 있어서 아시아에서는 이
른바 대동아제국을 공공연히 선포하면서 한반도와 만주를 일본영토화 하였고 중
국을 또한 침공하였다. 만일에 나치독일과 일본이 저들의 군사력을 총동원하게
되면 유라시아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러한 미래를
위하여서는 나치독일의 물리적인 해체가 시급함을 본회퍼에게 역설하면서 결국에
는 “검은 오케스트라(Black Orchestra)”와 접선하여 그 지하조직에 잠입할 것을 권
유하였다. 비록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나치독일의 해체를 위한 비밀작업을 지원
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벨 주교는 본회퍼에게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역사적인
소명의식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본회퍼에게 일차적으로 프라이부르그에 가
서 그곳의 명인사 카를 괴르델러 (Carl Goerdeler) 를 만나서 “검은 오케스트라”의
지하조직과 연결을 할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괴르델러라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라이프치히의 시장을 역임하였고 만일에 나치독일이 해체되면 임시
정부의 수반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유능한 인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본회퍼는 스
웨덴 시그투나에서의 비밀회의를 마치고 프라이부르그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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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 (Freiburg Memorandum) “역사의
0시에서 (In der Stunde Null)”

본회퍼는 1942년 10월 9일에 프라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벨 주교가 알


려준 카를 괴르델러 (Carl Goerdeler) 를 제일 먼저 만나서 “검은 오케스트라”라고
하는 반나치의 지하조직에 관한 소상한 경위를 잘 들었다. 그런데 나치독일의 정
보부 “Abwehr (방위)”의 총책임자 빌헬름 카나리스 (Wilhelm Canaris)와 알게 되면
서 본회퍼는 스스로 독일의 정보부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이것이 본회퍼의 이
중간첩적인 면모였다고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치독일의
정보부의 최고위치에 있었던 카나리스 역시 “검은 오케스트라”의 지하조직과 함
께 나치독일의 전복을 꾀하는 지하조직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에는 본회퍼는 카나리스와 함께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하게 된다. 프라이부
르그의 9명의 회원들에 관하여 본회퍼와 가까운 중요한 모임의 회원들이었기에
상세하게 소개한다.

1) 카를 괴르델러 (Carl Goerdeler, 1888-1945), 정치가 라이프치히 시장 역임

2) 발터 오이켄 (Walter Eucken, 1891-1950), 경제학자, 프라이부르그대학 교수

3) 콘스탄틴 디이체 (Constantin Dietze, 1891-1973), 법률가, 경제학자

4) 에맄 볼프 (Erik Wolf, 1902-1977), 법률가, 철학자, 프라이부르그대학 교수

5) 프란츠 뵘 (Franz Boehm, 1895-1977), 법률가, 경제학자, 교수

6) 게르하르트 리터 (Gerhard Ritter, 1888-1967), 역사학자, 프라이부르그대학교수

7) 클레멘스 바우어 (Clemens Bauer, 1899-1984), 역사학자, 경제학자, 교수

8) 레온하르트 밐쉬 (Leonhardt Miksch, 1901-1950), 경제학자, 교수

9) 헬무트 틸리케 (Helmut Thielicke, 1908-1986), 목사, 신학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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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이러한 9명의 학자들과 정치인들과 함께 프라이부르그의 “본회퍼 서클
(Bonhoeffer Circle)”을 조직하였다. 이들이 수차례 모여서 본회퍼의 기독교윤리사
상과 그의 깊은 신학사상을 근거로 하여서 이른 바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을
제창하였다. 여기에는 나치독일이 패망한 이후에 독일의 역사는 0시에서 새 출발
을 해야한다고 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여서 1) 기독교적인 정치, 2) 기독교적
인 사회, 3) 기독교적인 경제, 4) 기독교적인 기술개발 그리고 기독교적인 국제관
계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의 국제관계의 내용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보상문제가 심각히 거론되어 있다. 발터 오이켄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은 이른 바
새로운 경제유형인 “질서자유주의 경제체제 (Ordoliberalism Economics)”라는 것
을 구체화하게 된다. 여기에서 질서라고 하는 것은 벨 주교의 “세계질서”라는 개
념과 본회퍼의 기독교윤리에서 보여진 성서적 입장에서 이해한 “질서”라는 개념
이 서술되면서 새로운 독일정부는 바로 이러한 질서를 통제하면서 “자유경제체
제”를 유지하는 모범된 경제구조를 실현하려는 결단이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에
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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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질서자유주의 경제유형 (Ordoliberalism Economic
Pattern)

고전적인 경제이론 즉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케인즈의 “소비경제이론” 등과


는 전혀 다른 유형의 경제이론이 “질서자유주의 (Ordoliberalism)”이다. 러시아 (소
련)을 중심한 공산주의 제반 국가들 그리고 나치독일과 같은 전체주의 정치체제
에서는 기획경제만이 허용된다. 그러면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인 자유를 누릴
수가 없이 된다. 이러한 정치 경제의 분위기에서는 인간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국가의 정치와 경제구조에 예속되어 중세봉건시대 보다도 더 극심한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미국과 같은 “자유분방한 경제구조” 역시 이상적
인 경제유형은 아닌 것이다. 프라이부르그대학의 경제학과 교수 특히 발터 오이
켄, 프란츠 뵘, 레온하르트 믹쉬 등의 경제학자들이 연구팀이 되어서 본회퍼의 기
독교윤리사상을 근저로 하여서 새로운 경제유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질서자유주의 경제체제 (Ordoliberalism)”인 것이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은 것
이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이다. 곧 질서 그 자체는 창조주의 저작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서라는 개념을 연구해내어
기독교윤리를 근거로 한 자유로운 경제체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한 것이 이른 바
프라이부르그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들이 집약한 “질서자유주의 경제”인 것이다.
이것이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룩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이다. 당시의 유행어에는 “아데나워가 질서”의 표상이고, “에어하르트가 자유
주의 경제”의 표상이라고 하는 표현이 유포되고 있었다. 즉 프라이부르그대학의
경제학파에서 제창한 “질서자유주의 경제유형”이 그대로 서독의 경제부흥에서 들
어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사회라는 개념 역시 사회보장제도에 의하
여서 서독은 경제적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사회복지제도를 이룩한 모범된 국가라
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본회퍼의 신학과 발터 오

이켄 등과 같은 훌륭한 경제학자들의 깊은 사려와 노력이 전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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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오이켄과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전후 서독의 경제구조에 대하여 새로운 국면
을 개척하였다. 그들이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독일에서 뼈저리게 느낀것은 독점
의 현상과 인플레이션이었다. 이는 비기독교적인 경제악마로서 탐욕과 과소비현상
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경제악마를 분쇄하기 위하여서 기독교적인 질
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대 로마시대의 교부 터툴리안은 어느설교에서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인간이 서로 서로 필요한 만큼만 가지려고 한다면 지구에는 항상 넉넉
한 물자가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욕심을 가진다고 하면 지구의 물자
를 그 한 사람에게 주어도 모자랄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탐욕이 들어오면 혼자서
많이 가지려는 독점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대재벌그룹에서 협력업체인 중소기업과
공유하지 아니하고 과독점을 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며, 또 돈을 번 부유층이
규모가 없이 즉 무질서하게 돈을 사용하게 되면 사회에서는 인플레이션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보여진 가르침
과 주기도문의 내용에 보여진 천상의 질서가 사회에 투영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이렇게 하여 본회퍼의 기독교윤리의 개념으로부터 정립된 질서의 의미가
경제구조에 깊이 반영이 되어서 질서자유주의 경제유형이 생겨남과 동시에 복지
사회의 건설은 독점과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로부터의 관여로 인하여
구현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패전한 독일이 동서로 분단이 된 처
지에서 서독의 경제구조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전후의 서독의
민족중흥, 복지사회건설, 질서자유주의 경제유형 등이 세계만방에 알려지게 되면
서 서독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모범적인 성공사례로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동서독이 통일이 된 지금에도 독일의 질서자유주
의 경제유형은 가장 빼어난 경제이론으로 정립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
리나라의 경제구조에도 상당한 영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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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회퍼와 안중근의 경우, 세계사의 심판대 위에서….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회퍼 보다는 27세가 더 많았는데


1910년 31세에 만주의 뤼순에서 사형 당하였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에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이듬해
1910년 3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형 당하였다. 본회퍼 보다 27년 연장자인 안중근
은 10대에는 카토릭의 경건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 천주교의 신앙으로 교
육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리에 밝았고 진리의 편에 서서 생각한 정의로운 청
년으로서 역사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토 히로부미를 역사의 현장에서 내어 몰았
던 우리나라의 애국자였다. 그는 사형집행 당시에 황해도 천주교 교구장이었던
죠세프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바치고 미사집전을 받고 처형 당하였다. 비록
카토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있었으나 본회퍼처럼 기독교의 철저한 신앙심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을 마친데에는 서로가 공통되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본회
퍼는 나치독일을 해체시키거나 히틀러를 암살하는 일에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나
치독일의 치하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39세의 젊은 생을 마쳤다. 본회퍼와 안중근
의 공통점은 그들의 신앙심이었다. 그리고 역사의 심판대 위에서 정의감에 불타
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작열한 삶을 마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은
기독교역사상 순교자 내지는 성인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의 처형, 본회퍼의 플로쎈부르그에서의 교수형, 안중근의 뤼순형무
소에서의 교수형 등을 비교해 볼 수가 있다. 공통점은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 그
리스도는 십자가의 처형 이후에 그의 몸이 부활하였는데 다른 의미로는 자기 자
신을 복음이라 하였기 때문에 복음의 부활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본회퍼의 교
수형 역시 복음의 부활로 해석될 수가 있다. 그는 사형집행을 당하는 순간에 “그
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한 새로운
시작은 곧 복음의 시작이었다. 그 복음은 나치제국이 멸망하고 평화로운 새로 건
립되는 독일을 의미하였다. 나치의 종국이 그에게는 부활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에서 역설한 그리스도 중심의 정치, 사회, 경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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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등이 그대로 이룩된 것이 그의 복음의 부활이었다. 안중근 역시 31세의 젊
은 나이에 객지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생을 마쳤다. 그에게 있어서도 복음의 부활
이 생겨났다. 이는 일본제국의 음침한 그림자가 유라시아 대륙을 덮으려고 하는
역사의 전개를 중단시켰으며 새로운 시작의 동양평화의 역사가 생겨난 것이다.
만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그때에 살해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일본의 제국주의의
그릇된 동양평화의 그림자가 유라시아 대륙을 덮을 번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본회퍼, 안중근에게서 이러한 복음의 부활의 역사적인 현상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지구촌에 2천년전의 복음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계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20세기에 본회퍼를 통한 복음의 부활이 없었더면 거의 지구촌 전체가 나치독일의
경영체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안중근의 하얼빈에서의 거사가 없었다고 한다
면 동양평화의 복음은 지금은 어떤 향방에 놓여져 있을 것인가? 헤겔은 “세계사
는 세계심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계심판이란 적절한 때에 세계사의
현장에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세계심판은 로마판도
내에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생겨났다. 그때의 심판이 변함없이 지금까지 존
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시간의 중앙에 위치하여
서 시간의 전후를 가르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이 그 당시의 세계사의 광장에서
행하여진 세계심판이었다.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와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는 그때
의 세계심판이었던 십자가에 의하여서 확연해졌다. 그리고 그때의 세계심판이 오
늘날까지 변함없이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본회퍼와 안중근을 통한 세계사의 심판과 복음의 부활은 그리
스도의 복음의 부활과 함께 세계사에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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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

지금까지 본회퍼의 기독교사상에 근저한 “질서자유주의 경제유형”에 관하여 설명


하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항복이후에는 독일에는 거의 남자들이 남아 존재
하지 못하였다. 대부분 전쟁에서 희생되거나 부상 당하여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아데나워수상이 친히 열차편으로 시베리아로부터
데리고 온 병사들도 제대로 건강한 남자들 수효는 얼마되지 아니하였다. 전후의
독일의 복구사업은 오직 독일여성들의 손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여자아이들도 10
세 이상은 모두 다 폐허의 들판에 나아가서 어머니와 언니들과 함께 부서진 벽돌
들 중에서 온전한 것을 골라내어서 재건축자재로 사용하는 일에 하루종일 일을
해야만 하였다. 집에서는 10세 이하의 남자아이들이 가사를 도맡았다. 의자를 놓
고 그 위에 올라가서 조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만드는 광경이 그 당시의
기록영화에 남아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196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의 인력수출이
서독의 복구사업에 절실하였다. 그래서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이 서독의 경
제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독일국민이 부지런하고 강인하였다고 하
지만 그 폐허의 독일판도를 복구하는 일이 육체적으로 피곤한 일만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는 전쟁을 일으키고 스스로 패망한 나치독일은 남은 독일인들에게 주
변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의 따거운 눈초리를 견디어 내기에는 그들의 정
신적인 여력이 부족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같은 분단국인 한국에서 서독에 인
력들을 파견한 것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
루르탄광지역에서는 한국의 광부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
었다. 탄광에서 캐어내는 석탄을 수출하게 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바이나 과연 그 어렵고 위험스런 일을 누구가 감당할 것인가? 살
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독일남성들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주변국에서
는 독일인들의 비참함에 대한 냉대의 시선만이 있었다. 전후의 독일국민들은 저
주의 눈빛 이외에는 위로의 얼굴표정이나 서로 도와주려는 손길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나치독일의 박해로 600만명이 희생된 사건을 공공연히 이야기 하면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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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땅에서는 음악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한 유대인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
인이 프랑스와 네델란드 등에 와서 연주를 하면서도 독일땅에는 발걸음조차 내어
딛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러한 유대인들이 한 두명이 아니었다. 패전한 독일인
들은 유대인들의 얼굴을 대할 면목조차 없었다. 그저 “용서하여 주십시요, 우리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서 독일의 여성들은 오로지 독일의 복
구사업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디에선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이 들릴락 말락하였다. 세찬 바람소리 뙤약볓 아래에서 피땀을 흘
려가면서 폐허된 들판에 앉아서 망치를 손에 들고 남은 벽돌들을 정성스럽게 다
듬어서 그것으로 무너진 건물들을 다시 지어 일으켜야만 하였다. 한 젊은 유대인
청년이 바이올린을 들고 이러한 독일여인들 사이를 오가면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준 것이었다. 폐허의 작업장 들판은 순간적으로 감동의 눈물
의 바다로 변하였다. 종전후 독일이 복구되고난 이후에 바로 이 유대인 청년 바
이올리니스트는 명예로운 독일국적을 받았다. 바로 이 유대인 젊은 청년이 예후
디 메누힌 (Yehudi Menuhin)이었다. 우리나라의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들은 패
전한 독일이 한참 복구도중에 있을 때에 서독에서 가장 힘든 어려운 일을 도맡았
던 것이다. 간호사들은 부상해 돌아온 남성들 뿐만 아니라 복구사업에서 사고로
인하여 부상 당한 대다수의 여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과 보람이 되었던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이 이루어지던 때의 우리나라의 인력이 독일인들과 함께 한 에피소
드는 지금까지도 독일의 근대사에서 잊혀지지 아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란 무엇인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협동하고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
고 보살피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파독 광부들과 파독 간호사들은 바로 서독의 복
구사업에서 함께 동역하였던 아름다운 세계사의 지워지지 아니하는 성화로 독일
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서독의 라인강의 기
적은 곧바로 한국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평화를 이루었으니 어느날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
다고 가르쳐주신 주님의 음성이 바로 독일복구의 현장에 함께한 것이다. 라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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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은 화평케 하는 민족이 한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경
우였다. 우리도 가난한 처지에서 한번은 잘 살아 보아야겠다고 하는 결심으로 한
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본회퍼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헌신과 봉사와 협동과 화평케 하는 노력이 함께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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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본회퍼와 안중근의 세계사적인 유산

본회퍼와 안중근에 관한 간단한 비교에서 얻어진 결론은 두 사람이 모두 다 2천


년전에 로마의 판도내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사건으로 “복음의 부활”을 성취
한 것을 재현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안중근은 31세에 생을 마쳤고 본회퍼는 39세
에 생을 마쳤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절대로 비열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모두 다 바울사도의 음성처럼 죽음의 순간에 임하였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
이 어디에 있으며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
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더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아
니함을 앎이니라” 본회퍼는 형장에서 교수형을 받기 직전에 의연한 자세로 무릎
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은 죠세프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를 바치고 정중한 미사집전과 함께 생을 마쳤다고 한다. 안중근 역시 사망의 쏘
는 것을 이겨낸자가 아니었던가? 본회퍼와 안중근에 의하여서 세계평화의 복음이
다시 부활하였던 것이다. 나치의 세계정복의 야욕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
니었다. 히틀러와 나치군인들에 비하면 본회퍼는 한 나약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
았다. 그러나 세계사는 이러한 하나님 편의 본회퍼와 함께 하였다. 안중근 역시
대동아제국을 꿈꾸면서 호전적인 일본의 제국주의 앞에서 그는 사망의 권세에 절
대로 비열하게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본
회퍼와 안중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세계사의 복음을 부활시킨 참다운 그리
스도의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본회퍼와 안중근이 세계사에 남긴 유산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하는 것과 정의가 개인과 사회에
충만해야 할 것과 사랑과 헌신과 봉사와 협동이 지구촌에 사는 인류들을 하나로
묶어놓을 수가 있다고 하는 명제를 남겨준 것이다. 이는 철저한 그리스도의 정신
으로 무장된 삶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사는 세계심판이다 라고 말
한 헤겔은 진리의 명제를 인류들 앞에 감히 부르짖었다. 그러면 세계사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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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심판하는 것인가? 이는 역사의 주인공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계사를 주관하시는 장본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외아들 우리 수 예수 그리
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시간의 중앙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축에서
그 중앙에 계시는 주님을 섬기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등에 걺어지지 아니하고서는 세계사의 심판대에 나아갈 수
가 없는 것이다. 1919년 3월 1일의 민족적인 “독립선언서”는 다만 한반도에서 생
겨난 그리고 한반도에만 국한된 그러한 선언문이 아니다. 동양평화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우렁찬 하나님의 세계사를 통한 음신이다. 본회
퍼와 안중근에게는 서로 공통된 이러한 세계정신이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도 넘쳤
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우리나라의 3.1 독립선언서가 세계사의 평화의 이념

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의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


써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

존의 올바른 권한을 영원히 소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내세워 이것을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과 충성을
합하여 이를 선포하고 밝히는 것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의 양심의 발로로 인한 세계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하고 함께 나
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것은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가 함께 존재하고 함께 사는 권한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아래에 어떤 것이라도
이를 저지하거나 억제치 못할 것이다.

옛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로 인해 희생되는 역사가 있은 후 수 천년


동안에 처음으로 우리가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당한지 10년이 지났는
지라. 그 동안 우리들의 생존권이 박탈되고 손상됨이 무릇 얼마이며, 마음과 정신
의 발전이 장애를 입음이 무릇 얼마이며, 민족의 존귀함과 영광됨이 훼손됨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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릇 얼마이며, 새롭고 예리한 독창성으로써 세계문화의 큰 흐름에 기여하고 일으

켜 세울 기회와 인연이 없어짐이 얼마인가?

오호라! 예부터 내려오는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하면, 지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고


하면, 장래의 위협을 없이하려고 하면, 민족적인 양심과 국가적인 대의가 짓눌리
고 시들어 버린 것을 되살려 일으키려고 하면, 각 사람의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이룩하려고 하면, 가련한 아들 딸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려
고 하면, 자자손손이 영구하고 완전한 축복을 누리게 하려고 하면, 최대로 급한
업무가 민족적인 독립을 확실하게 해야 함이니 이천만 각 개인마다 마음에 칼을
품었음을 후회하니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적인 양심이 정의군대가 되고 인륜
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서 우리를 지키고 지원해 주는 오늘 우리는 나아가 이를
얻고자 하매 어떤 강함도 이를 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물러서서 일하는데 어
떤 뜻인들 펼쳐지게 하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래 시시때때로 맺은 굳은 약속을 져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뢰없음


을 탓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조상때로
부터 물려받은 이 터전을 식민지로 알고, 우리의 문화민족을 미개한 사람으로 대
하여 한낮 정복자의 즐거움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영구한 사회기초와 우리의 뛰
어난 민족심리를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롭지 못함을 책망하려 하지 않노라! 자
기를 일으켜 세우기에 급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노라! 현재를 준비하기
에 바쁜 우리는 지난날의 잘 잘못을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자기의 건설을 위해 있을 뿐이요 결코 다른 이들의 파괴를 위해 있지 아니

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집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지나간 원한


과 일시의 감정으로써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배척함이 아니로다. 옛 사상과 옛
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로 하여금 그 공명심에 의한 희생이 부자연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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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착오상태를 개선하고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바탕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민족적인 요구로 나타나지 아니한 양국의 병합
의 결과는 결국에는 일방적인 억압으로 이루어진 차별적인 불평등과 통계숫자 상
의 허식아래서 이해가 상반된 양 민족간의 영원히 일치할 수 없는 원한의 도량이
이익은 없이 깊이만 늘어가는 오늘의 실적을 보라! 용맹하고 과감하게 옛 과오를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같은 정서에서 기본을 둔 우호적인 새로운 국면을 타개
해 나감이 서로의 원한을 멀리하고 복을 불러드리는 첩경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2천만 울분과 원한이 쌓인 국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
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이유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동양의 안위의
주축인 4억만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질시를 갈수록 짙어지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전국면이 함께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 우리들
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의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
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로부터 나와서 동양을 지키는 중차대한 책임을 온전케 하
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서도 버리지 못한 불안공포로부터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 문제이리요!

아! 새로운 천지가 눈앞에 전개되는 도다. 위력의 시대가 지나가고 도의 시대가


오는 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되고 오래도록 길러진 인도적인 정신이 바야흐로
새로운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작하는 도다. 새 봄이 세계에
왔으니 만물이 다시 소생을 재촉하는 도다. 추운 얼음과 눈의 계절이 호흡을 할
수 없었던 지난 일시의 시세라 하면 순풍의 화합과 온화한 태양빛에 생기가 다시
움트는 것은 지금의 시세이니 천지의 운이 돌아오는 이때에 세계의 변조에 편승
한 우리는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탄식할 것이 없도다. 우리의
고유한 자유권을 완전히 누려서 풍성한 삶의 낙을 만끽할 것이며 우리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 찬 큰 세상에 민족적인 빛남을 꽃피우리라!

우리가 지금 분발하여 일어나는 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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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아가는 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간의 음울한 낡은 집에서 활발히 뛰
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이룩하게 되는 도다. 백년 천년간의 조
상들의 영혼이 우리를 은연중에 지켜주고 전 세계의 기운이 우리를 밖에서부터
보호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머리앞의 광명을 따라 약진할 따름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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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새로운 국면에서의 고찰은 그가 처한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서술하였다. 그것은 제정러시아때의 제국주의 이념에 의한 세계통치의 시작
에 관하여 러시아의 챠르 니콜라이 2세와 함께 논하였다. 이러한 제국주의는 명
치유신때에 일본이 그대로 직수입하였다. 그래서 1905년 한일합병 사건이 생겨나
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의 세계사에 대한 부족한 역사의식은 1918년 이후에 끝나
게 될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예견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세계사의 역사의식이 역부족한 민족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바이다. 세계 제1
차대전의 패전은 지구상에서 제국주의 정치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바이마르공화국때에 잠시 평화로운 민주주의 이상이 실현된 때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면서 나치독일의 제국주의
보다도 더 강한 전체주의 군국주의체제가 삽시간에 유럽판도를 뒤덮어 버렸다.
그때에는 영국, 미국, 러시아 등에서 세계사의 향방을 이해할 수가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에서는 종전의 제국주의 보다도 더 끔찍한 사악한
정치의 형태를 가지고 세계제패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세계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지 아니하셨다. 우리는 본회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사
상에서 나치독일과 정면적으로 충돌한 사건을 연구해 보았다. 그것은 영국의 성
공회의 죠지 벨 주교와의 만남에서 구체화 되고 본격화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본
회퍼는 프라이부르그 메모란둠을 결성함과 동시에 그의 행동하는 기독교정신은
“검은 오케스트라 (Black Orchestra)”에서 지도적인 위치에서 나치독일의 전면적인
해체를 진두지휘를 한 것이다. 그것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계획과 직접
적인 연관은 되지 아니하였으나 최후의 나치독일에서의 결론은 본회퍼의 근본적
인 기독교윤리적인 정신이 나치독일의 해체를 감히 지하조직을 통하여 실현코자
한 것이 들어난 것이었다. 결국 당시의 정보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Wilhelm
Canaris)와 함께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당시의 동양평화를 일본제국주의의 그림자로 드리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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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써 일본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세계제패는 일단은 중단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 1945년 나치의 패망과
함께 일본의 패망이 불가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본회퍼와 안중근에게서
세계사의 광장에 나타난 세계심판을 있는 그대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 작은
논고에서는 인간 앞에는 무기력하게 보이는 한 청년이었던 본회퍼에게서 그리고
안중근이라고 하는 마찬가기의 무기력하게 보였던 30세의 젊은이에게서 세계사의
향방이 바뀌게 된 것을 세계사의 광장에서 확인해 볼 수가 있었다. 그러한 세계
사의 정신이 1919년 3월 1일의 선언문에 소상히 기록으로 남겨진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3.1 정신은 세계사의 향방에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있음
이 분명히 들어났다. 이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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